231015_설교정리_영적인 믿음인가, 육적인 믿음인가 (요4:46~50)
○ 말씀전문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 받은 말씀
지난 주 설교에서 카이로스의 시공간이 크로노스의 시공간을 터치 할 때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되도록이면 간섭하지 않으시고, 자유롭게 운영되도록 그 자율권을 존중하는 크로노스의 시공간 이지만, 이 시공간에도 하나님의 권능이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기적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은 우리의 믿음과 순종에 의해 역사하게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럼 카이로스의 시공간이 크로노스의 시공간을 터치하여 기적을 일으키게 하는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이어야 할까요?
1. 진정한 믿음은 때론 고난을 통해서 자라게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굳건한 믿음을 갖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뜻하는 그 진정한 믿음은 일상에서는 쉽게 얻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다가 내 힘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오히려 믿음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고 자기 소견대로 살던 사람이, 어찌 할 수 없는 궁지, 즉 광야같은 상황에 내 몰렸을 때 하나님을 찾고 부르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광야에서 자라나고, 광야에서 발휘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해결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 46절과 47절을 보면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이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의 신하라면 아마도 권력이 있고 재력도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아마도 이름 있는 의사를 불러도 보았을 것이고 온갖 좋은 약이란 약은 다 구해서 먹여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차도가 없자 내 힘으론 어쩔수가 없구나 하는 궁지를 느꼈을 것입니다. 이때가 바로 믿음이 발동하는 계기가 됩니다.
육적인 삶에 익숙한 우리는 고난을 만나게 되면 그 고난을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발버둥칩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때 비로소 영이 발동하게 됩니다. 믿음이 발동하게 됩니다. 고성준 목사는 [카이로스]에서
"우리의 영혼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믿음으로 통과할 때, 그 때 만들어진다. 다 이해되는 상황을 통과할 때는 혼만 커지고 영이 성장하지 않는다. 다 이해할 수 있는데 뭐 굳이 다른 것이 필요하겠는가? 이해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통과할 때는 어떤가? 혼의 생각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때 비로소 우리 안에 영이 움직이기시작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 속에서도 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할 것인가? 이해할 수 없는 이 절망 속에서도 나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신뢰할 것인가? 내 안에서 영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언제? 혼이 멈춘 그때에!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혼이 더 이상 해답을 찾을 수 없는 그때에, 비로소 영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윗은 언제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이 생겼을까요? 시편 34편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34편 8절부터 10절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것는 다윗이 사울을 피해 가드로 도망했을 때 지은 시입니다. 가드는 바로 골리앗의 고향이었습니다. 사자굴로 찾아든 샘입니다. 그들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을 때 다윗은 침을 질질 흘리며 미친척 했습니다. 이때 그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그는 이같은 상황에서 이 시에서 처럼 믿음의 진가를 드러냈습니다. 그 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았지만, 바로 이때 다윗의 진정한 믿음이 곤고해졌을 것으로 믿습니다.
영적이든 육적이든 고난이 덮쳤을 때, 우리는 그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떠날 것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을 세울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카이로스의 시공간이 나를 덮치는 기적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2. '내 생각' 이라는 혼(육)적 믿음을 넘어서야 합니다.
사람마다 육이 강한 사람, 혼이 강한 사람, 영이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중 영이 강한 사람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혼이 강한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애가 강한 사람입니다. 자기 보호 본능이 강하고 자기 주관이 강한 사람, 자기 아집이 강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왕의 신하도 처음에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47절부터 49절입니다.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내려오라는 말을 두 번이나 합니다. 직접 내려와서 치료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믿음이 아니라 직접 보기를 원했습니다.
이런 유사한 사람을 성경에서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나아만이 그랬습니다. 열왕기하 5장 10절과 11절입니다.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내 생각에는' 라며 자기애가 강한 그런 나아만에게 하나님은 요단 강에 내려가 일곱번을 씻으라고 했습니다. 7은 완전수입니다. 완전수는 완전히 자아가 깨뜨려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자아가 완전히 깨뜨려질 때, 비로소 영이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혼의 믿음을 넘어서서 영의 믿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깨어질 때, 비로소 주님이 일하시기 시작하고 역사하게 됩니다. 내가 바로 서게 되고, 내 가정이 바로 서게 됩니다. 오랜 신앙 생활 속에서도 내 믿음이 자라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내 생각과 내 자아가 나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처음에는 혼이 강했던 사람입니다. 지금의 아테네인 아덴으로 전도를 갈 때만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혼이 강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자기 철학과 사상이 잘 먹힐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그의 전도 여행은 처참한 실패였습니다. 한명도 전도하지 못했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그는 깨닫고 그 다음 전도지인 고린도에서는 전여 다른 모습을 취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고린도전서 2장 3절부터 5절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육이 약해져야 영이 강해진다는 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이것은 바로 내 생각과 내 판단이 깨어질 때 내 믿음이 성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으로 카이로스 시공간의 기적을 크로노스에서 맛보려면 이 성숙된 믿음이 필요함을 기억하고, 내 생각과 내 자아를 내려놓은 혹독한 자기 훈련을 해야 합니다.
3. 말씀을 신뢰하는 영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는 영이 혼을 지배하고 혼이 육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육이 혼을 지배하는 삶을 살게 되면 타락의 삶을 살게 됩니다. 육신이 영의 자리를 차지하고 지배하려고 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영적인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왕의 신하는 혼적 믿음이 강했던 사람입니다. 오늘 성경에는 간단히 기록되어 있지만, 그런 그가 예수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의 대화를 통해 점차 영적 믿음으로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50절과 51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여기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라는 대목을 영어성경에서는 'The man took Jesus at his word'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품고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의 신앙이 성숙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영적 믿음의 사람으로 변했음을 의미합니다.
좀 더 깊이 살펴보면,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집을 향해 떠난 것은 그 다음날이었습니다. 우리라면 아마도 곧장 집을 향해 만사 재쳐두고 달려가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바로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곧장 믿고 마음의 평강을 얻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봐야만 직성이 풀리고 안심이 되고 믿어지는 우리와는 달리 그는 말씀만 듣고도 신뢰하고 평강을 얻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얻는 평강, 이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우리도 가끔 고난 중에서 기도할 때, 그 고난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을 믿고 평강이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이런 믿음이 쌓여갈 때, 우리의 믿음은 점점 진정한 영의 믿음 상태로 성숙해 갑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쌓아가면, 그 어떤 난관 속에서도 카이로스의 시공간이 터치하는 기적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