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004_설교정리_온전한 믿음
사도행전 (19장 1절 ~ 7절) 온전한 믿음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
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침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침례로라
4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침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
역사상 지금이 가장 잘 사는 시대라고 하지만 마음엔 허탄함이 가득하고
삶이 힘들게 느껴지기만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환경 때문에, 남편 때
문에, 자식 때문에 못살겠다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 때문인 경우가 더 많
습니다. 자신이 바뀌면 많은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지만 자신을 바꾼다
는 것 또 한 쉽지 않습니다. 이럴 때, 내 힘으론 도저히 극복할 수 없다고
여겨질 때 성령을 도움을 구하면 극복해 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
은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침례는
받았지만 성령은 계심도 몰랐다고 합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다시 예수님
이름으로 침례를 행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고 온전한 믿음을 얻게 되었습
니다. 그럼 바울이 왜 그들에게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을까요?
1. 요한의 침례의 한계 때문입니다.
요한은 침례는 회개를 통한 변화된 삶을 요구합니다. 이는 도덕적, 윤리
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려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복음의 관
점에서 보면 구원은 없습니다. 변화된 삶을 넘어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
해서는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착하게 사는 것이 요한
침례의 한계인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성령의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2. 성령의 침례의 생명 때문입니다.
요한의 침례에는 생명이 없지만 성령의 침례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깨끗
하게 살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영생 즉 생명으로 옮겨졌느냐의 문제
입니다. 성경의 생명의 영입니다. 이성적으로는 성경의 내용이 받아들여
지지 않지만 성령으로 거듭나면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은 성령이 내게 임하셨음을 의미합
니다. 성령의 임재는 오감을 뛰어 넘습니다. 이성적 재단이 불가합니다.
3. 성령의 충만의 필요 때문입니다.
침례는 한번으로 족하지만 성령의 영향력은 언제든지 변합니다. 충만 할
수도 있고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늘 성령 충만 함을 위해 기도
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 여부는 우리 자신의 책임입니다. 살다
보면 어려운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 어려움을 내 힘으로 극복할 수가
없을 때, 성령충만 함으로 극복하는 축복의 삶을 살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