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26_설교정리_NO라고 말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라
○ 말씀전문
[느헤미야 6 : 1~3]
1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원수들이 내가 성벽을 건축하여 허물어진 틈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그 때는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였더라
2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하고자 함이었더라
3 내가 곧 그들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중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하매
○ 받은 말씀
지난 주에 한 후배를 만났습니다. 의욕적으로 교회 개척을 했었는데 결국은 지키지 못하고 무너져가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무엇이든 그것을 잘 지켜나간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의 터전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을 지키고, 직장을 지키고, 사업장을 지키고, 가정을 지킨다는 것이 마음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가정, 직장, 사업장, 교회를 지키는 문제는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큰 숙제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오늘 느헤미야가 재건한 성벽을 어떻게 지켜나가는지를 보고, 우리도 우리의 소중한 일터와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NO라고 말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벽 재건에 훼방을 놓아 왔던 산발랏과 도비야는, 그들의 방해공작에도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자 작전을 바꾸었습니다. 화해의 제스처를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느헤미야에게 편지를 보내 만나자고 했습니다. 방해 공작이 멈추어지고 화해의 제스처로 다가왔기에 어쩌면 느헤미야에게는 솔깃한 제안으로 생각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단호히 거절을 했습니다. 4절에 보면 무려 4번이나 반복된 제스처에도 4번 다 단호하게 No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화해에는 손을 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용서의 한 방법입니다. 하지만 정직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No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것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면 더 큰 화을 직면하게 됩니다. 반면에 건강한 삶의 영역, 정직한 것은 잘 지켜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무엇이 정직한 것이고 무엇이 정직하지 않은 것인지 그 바운드리를 잘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월요일이면 안식을 취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결단한 것이고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그것은 그것이 내 신앙에도, 교회에도 유익이 된다고 믿기 때문에 꼭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많다 보니, 심방을 요청하는 성도들이 월요일이라고 예외가 있는 아닙니다. 그 때마다 수용하고 싶은 유혹에 빠집니다. 하지만 저는 단호하게 내려 놓습니다. 할 수 있다고 해서 다 하려고 하면, 그것은 어쩌면 내가 하나님이 되려는 마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이든 다 해 줄 수 있다는 생각과 자신감은 나를 교만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단호하게 No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내 영혼을 정직한 영역으로 잘 지켜가기 위해서 어떤 정직한 No를 해야 하는지도 생각해 보기를 권합니다. 세상의 악에 대해서는 당연히 No라고 해야 하지만, 우리의 영적 유익을 지키기 위한 정직한 No도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정직한 No를 정의해서 삶에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의 신앙과 영적 건강을 지켜가는 길입니다.
2. 사단이 심는 두려움을 이겨야 합니다.
사단이 가장 좋아하는 유혹의 수단이 바로 두려움입니다. 산발랏과 도비야도 이 두려움을 이용하고자 했습니다. 인봉하지 않은 편지를 써서 느헤미야에게 보냈습니다. 그 속에는 네가 왕이 되려고 하는 것 아니냐는 내용이 들어있었습니다. 인봉하지 않은 것은 그것을 누구든 중간에 열어볼 수도 있고, 또 그 내용이 파사 왕에게 전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이용했습니다. 느헤미야가 '왕에게 알려지면 어떻하지?' 하는 마음의 두려움을 갖게 할 의도였습니다.
그리고 제사장 스마야를 매수해서, 스마야를 통해 느헤미야에게 지성소에 숨으라고 했습니다. 지성소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으므로 그 어떤 이스라엘 백성도 널 찾기 위해 지성소를 뒤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니다. 거기에도 분명한 의도가 있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지성소까지 더렵혔다고 소문을 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 느헤미야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냐고 할 교묘한 속임수가 있었습니다. 두렵게 해서 성벽을 포기하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종교부지를 매입하기로 하고 얼마 되지 않아 코로나가 터졌습니다. 개척을 한 지 1년 반 밖에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서운 두려움이 몰아쳐 오기 시작했습니다. 예배실의 문까지 닫게 되었는데, 중도금을 어떻게 마련하지 하는 두려움으로 밤 잠을 설칠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내게 남은 것은 기도하는 것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예레미야 29장 11절이 눈에 들어왔으며, 그 말씀이 내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마음 속의 두려움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든 두려움이 있다면 이 말씀을 받기를 원합니다. 세상의 음성에는 귀를 닫고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사단은 가장들을, 엄마들을, 자녀들을 두렵게 해서 뭔가를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사단의 놀음에 놀아나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소중한 것들을 지키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두려움이 찾아오면 성경을 펴고,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격려를 구해야 합니다. 그 두려움을 이겨내려고 해야 합니다.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아야 합니다. 신명기 31장 6절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
사단이 심는 두려움을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이겨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무대 뒤에서 일하시는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소녀와 할아버지가 함께 노를 저어가는 사진이 제게 큰 감동을 주었고 공감을 하게 했습니다. 소녀는 마치 자기가 노를 저어서 배가 나아가게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배가 나아가는 결정적인 힘은 뒤에서 소녀를 안고 함께 노를 젓는 할아버지의 힘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루는 그 어떤 것도 우리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 뒤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이 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의 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15절과 16절입니다.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영어 성경이 더 실감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God was behind this work. 52일만에 성벽을 재건한 것은 자기의 리더십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주시고, 산발랏과 도비야의 모함을 막아주셨기 때문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 신축에도 그런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을 것임을 믿습니다. 코로나 시기에도 중단없이 부흥하게 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아무런 잡음 없이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건축을 지켜나가는 길입니다. 그 신뢰에 성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한 마음으로 함께 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우리가 일하면 우리가 일하지만,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한 도움이 있을 때, 우리가 숨 쉴 수 있게 되고, 우리가 일 할 수 있게 됩니다.
[나의 사랑, 나의 십자가]를 통해 자기 고백을 하신 장동근 목사님이 그 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는 자기의 20대는 최악의 시기였다고 고백합니다. 아버지는 그가 초등학교 다닐 때 자살을 하셨고, 어머니는 한쪽 손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는 감옥에서 평생을 살다가 갈 인생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이 찾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방 세 칸이 있는 집에 대한 꿈이었습니다. 그는 그 꿈이 자기의 미래에 대한 꿈이라고 확신 했습니다. 첫째 방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방청소를 하는 꿈이었고, 두번째 방에서는 한 여인이 편지를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방에서는 열심히 런닝 머신 위에서 뛰어가는 꿈이었다고 합니다. 꿈에서 깬 그는 첫번째 방은 회개의 방이며, 둘째 방은 사랑의 방, 그리고 셋째 방은 사명의 방임을 깨닫고 그 믿음으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는 주님이 자기를 찾아와 주셨고, 그리고 자기를 위해 일하셨으며, 자기에게 일하게 해주셨다고 믿고 살아왔습니다. 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평생 감옥에서 지내다 죽을 것이라는 그를 새롭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일 하심에 대한 신뢰가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의 소중한 것, 소중한 삶을 지켜가게 하는 원동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