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230319_설교정리_성공은 축복이 아닌 십자가이다 (느 5:15~18)

서정원 (JELOME) 2023. 3. 20. 14:07

○ 말씀전문

15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16 도리어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내 모든 종자들도 모여서 일을 하였으며

17 또 내 상에는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 백오십 명이 있고 그 외에도 우리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 중에서 우리에게 나아온 자들이 있었는데

18 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한 마리와 살진 양 여섯 마리를 준비하며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 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나니 비록 이같이 하였을지라도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이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었더라

 

○ 받은 말씀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하면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옛날엔 중매를 통해서 부부가 만나게 되었지만 요즘은 대부분 연애 기간을 거치게 됩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충분히 알아보고 결혼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그런 확인 절차를 거치기 때문인지, 아니면 결혼에 대한 사고의 차이인지 결혼이 쉽게 성사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나이 든 성도들의 기도 제목 중에 자녀의 혼사에 대한 기도 제목이 참 많습니다. 가정을 이루는 일이 옛날보다 쉽지 않게 된 것이 현실인 듯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렵게 이룬 가정도 옛날보다 더 쉽게 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혼에 대한 부담감이 줄어서 일수도 있지만 어떻든 가정을 지켜가는 것이 가정을 이루는 것 보다도 훨씬 어려운 것이 또 다른 현실인 듯 합니다. 

비단 가정 뿐만 아닙니다.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말씀은 성벽의 재건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지켜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느헤미야는 어떻게 그것을 지켜가는 지를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그 일깨움을 거울 삼아서, 우리 성도들 가정과 사업마다 잘 지켜지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려면...

 

1. 내부적인 갈등의 문제를 지혜롭게 풀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5장 2절과 3절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양식을 얻어 먹고 살아야 하겠다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가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저당 잡히고 이 흉년에 곡식을 얻자 하고" 성벽 재건이 이루어져 가는 동안 이스라엘에는 크게 3가지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흉년과 기근이 찾아 왔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형편이 어려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세금의 징수는 계속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그 와중에도 동족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의 이자놀음을 하는 자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성벽재건에 대해 산발랏과 도비야와 같이 직접적으로 방해하는 외부적 공격 뿐만 아니라, 이상과 같은 환경 속에서 백성들의 내부적 갈등도 쓰나미처럼 몰려왔습니다. 방해 세력들의 공격으로 인해 성벽을 재건하는 것도 힘든데, 엎친데 덮친격으로 동족들을 등쳐 먹는 자들까지 발호하다 보니, 백성들은 심한 갈등에 사로잡혔습니다. 

어떻게 보면, 외부적인 공격 보다는 내부적인 자기 갈등이 우리를 더 힘들게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일 보다는 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이 더 힘듧니다. 부부갈등, 자식과의 갈등이 우리를 더욱 진 빠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인 문제 해결 능력도 중요하지만 내적인 갈등을 지혜롭게 풀어갈 수 있는 능력이 더욱 중요함을 깨닫고 그 지혜를 구하고, 그 지혜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전에 알던 목사님 한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기억하고 있던 목사님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라져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머리는 하얗게 변하셨고, 얼굴은 늙고 지친 모습이었습니다. 사정을 들어보니, 목회를 하면서 10년 동안 큰 마음의 고생을 하셨다고 합니다. 교회가 원로목사파와 담임목사파로 갈려서 파당을 이루었으며, 심지어 원로목사파는 1층에서, 담임목사파는 2층에서 예배를 드려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람 간의 갈등이 목사님을 지치게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내적 갈등은 대부분이 마귀의 농간입니다. 마귀는 디아(사이에)와 볼로스(던진다)의 합성어입니다. 이 디아볼로스가 누구를 향해 던지는지 잘 볼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그 마귀의 농간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귀의 농간에 떨어지더라도 그것을 지혜롭게 풀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마귀의 농간도 우리의 신앙을 한 단계 더 성장시키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내적 갈등을 예방하고 푸는 방법으로 "본질에 있어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관용으로, 그리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 대하는 지혜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방법을 기억하여 내적인 문제를 지혜롭게 풀고, Good Peace Maker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내적 갈등을 겪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만, 우리에게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다른 사람에게 내적 갈등을 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내가 내적 갈등 속에 떨어지는 것 못지 않게 남들에게 내적 갈등을 하지 않게 하는 지혜도 동시에 필요합니다. 

성벽을 재건 하는 동안 발생한 기근과 흉년, 그리고 과도한 세금징수는 우리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환경적 요소입니다. 하지만 그런 어려운 사람들을 이용해서 고리대금업을 한 자들의 소행은 참으로 나쁜 일입니다. 그것도 남이 아닌 자기 동족에게 말입니다. 이런 그들을 느헤미야는 분노하여 꾸짖습니다. 5절과 7절입니다.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된 자가 있고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도다 하더라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깊이 생각하고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높은 이자를 취하는도다 하고 대회를 열고 그들을 쳐서" 느헤미야는 이 말 속에서 '우리'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합니다. 같은 민족, 같은 형제끼리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분노했습니다. 

8절과 9절에서도 계속됩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하매 그들이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행이 좋지 못하도다 우리의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할 것이 아니냐"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란 자들이 할 짓이냐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냐고 질책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일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 보다도 중요한 것은 부끄러움을 알고 사는 것입니다. 안중근의사를 다룬 '동주'라는 영화의 주된 줄거리가 바로 부끄러움입니다. 안중근의사가 붙잡혀서 고문을 당할 때, 동조한 사람들의 이름을 쓰라고 강요 받았을 때, 안중근의사는 "나는 고문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부끄러워서 못 쓰겠다" 라고 했습니다. 나라가 이 지경인데 자신은 시 나부랭이나 쓰고 있었음이 부끄러워서 그들의 이름을 쓸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룬 것이 가정이든, 사업이든, 아니면 개인적인 영광이든 그것을 제대로 지켜가려면 우리는 기본적으로 염치를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랑하고 으시대며 그것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고 지켜가는 과정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자식들을 제대로 뒷바라지 못한게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그 자식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끌어주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 해야 합니다. 내 자신의 영달만 생각하고 남에게 피해를 준 것은 없는지 돌아보고 부그러워해야 합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습니다. 올바르게 살아갑니다. 그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올바른 삶이 그에게, 이룬 것을 지켜가게 해 줍니다.

 

3. 성공은 축복이 아니라 십자가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왕의 술 맡은 관원장이었습니다. 지금의 시대와 비교해 보면 아마도 대통령 비서실장쯤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떵떵거리며 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성벽 재건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을 자원하였습니다. 성공을 축복으로 누리며 살지만은 않았습니다. 

신앙에서의 성공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안에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할 게 없다면, 그것은 신앙에서 실패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 사명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과감하게 술관원장 자리를 박차고 예루살렘 행을 택했습니다. 십자가 사명을 택했습니다.

그는 총독의 지위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14절과 15절입니다. "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부터 제삼십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당시 총독으로 부임하면 전임자들은 은 40세겔을 거두었습니다. 1세겔은 노동자의 4일치 노임과 같았습니다. 40세겔은 160일치에 해당합니다. 그런 권한이 있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2년 동안 녹도 받지 않았습니다. 

총독으로서의 직분을 다하려면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잦은 리셉션 때문입니다. 18절입니다. "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한 마리와 살진 양 여섯 마리를 준비하며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 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나니 비록 이같이 하였을지라도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이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었더라" 하지만 그는 녹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가 이렇게 40세겔을 거두지도, 또 12년간 녹을 받지도 않았던 이유는 '백성들의 부역이 무거움을 보았기 때문' 이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보고,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을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그 어려움을 감당하는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는 총독의 자리를 축복의 자리가 아니라 십자가의 자리로 삼았습니다.

우리도 각자가 선 자리에서, 이 자리 이 위치에서 내가 감당해야 할 사명은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명을 위해 내가 가진 것을 축복이 아니라 십자가로 여기며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룬 것을 지키게 해 줄 것입니다.

후배 중에 스타트업 기업으로 옮겨서, 좋은 대우를 받고 일하게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회사로부터 좋은 차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나와 약속한 곳으로 올 때, 택시를 타고 왔습니다. 왜 좋은 차를 누리지 않고 택시를 타고 왔냐고 했더니, "예수 믿는 사람인데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하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공한 자리를 축복으로 생각하지 않고 십자가로 생각하는 그 후배 같은 사람이 자기가 이룬 것을 더 인정 받고, 더 지켜갈 수 있지 않을까요?

이찬수목사님의 인터뷰 중에 언급하신 내용이 생각납니다. "그리스도로서의 시작은 말구유였고, 끝은 십자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