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221030_설교정리_우리가 사모하는 공동체 (11)_믿음의 역사를 이루는 공동체 (살전1:2~4)

서정원 (JELOME) 2022. 10. 31. 06:26

○ 말씀전문

[데살로니가전서 1장 2절~4절]

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 설교를 듣고

언젠가 한번 소개를 해드렸던 한홍 목사님의 [내게 힘을 주는 교회] 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 일부를 다시 펴 보았습니다. "머릿수만 많다고 공동체가 되는 게 아니다. 공동체는 서로의 책임을 완수할 때 든든히 세워지는 것이다. 다들 각자 제 살길 찾겠다고 흩어져서 책임이 무너지면 공동체 전체가 함께 무너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공동체가 무너지면 개인도 무너지게 된다. 나와 공동체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나가야 할 때 함께 나가지 않으면 공동체 전체가 무너진다. 버텨야 할 때 함께 버텨주지 않으면 공동체 전체가 무너진다. 특히 재능 있는 자, 힘 있는 자가 자기 자리를 지켜주지 않으면 전체가 죽는다. 그래서 가진 자의 이기심이 무섭다"  우리가 소망하는 공동체는 무너지는 공동체가 아니라 믿음의 역사를 이루는 굳건한 공동체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마음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개척을 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교회에서 3주 정도 밖에 머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늘 마음에 부담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훗날 이 데살로니가 교회로부터 훈훈한 소식, 감사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 소식은 바울에게 기도할 때마다 감사하게 하고 힘이 나게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굳건한 믿음의 공동체로 세워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바울은 왜 기도할 때 마다 이 교회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을까요?

 

1. 믿음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기도할 때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기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 가운데 가장 먼저는 '너희의 믿음의 역사'라고 말했습니다. 쉬운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여러분이 믿음으로 행한 일들' 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믿음으로 행한 일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가 믿음으로 이룬 일들이 소문으로 들려왔던 것입니다. 

주일마다 우리는 교회로 나갑니다. 나가서 예배를 드립니다. 각자 마다 예배에 대한 생각에 차이가 있고, 예배를 통한 만족에도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냥 주일이 되었고, 나는 교인이므로 당연히 주일 예배에 참석해야 한다는, 당연한 의무감을 가지고 참여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목사님이나 주변 교인들의 눈이 부담스러워서 참여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을 일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출석을 했던 간에, 거기에 믿음의 역사가 없다면, 우리의 신앙 생활은 무미하고 무의미한 것 아니겠습니까? 

윌리엄 캐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십시오" 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냥 무미 건조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믿음의 역사가 뚜렷이 만들어지는 신앙생활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그냥 주일이면 나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평범한 교회가 아니라, 믿음의 역사가 드러나는 그런 위대한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신경 쓸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목사님과 다른 성도들이 다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했습니다. 이 믿음을 바라보고 나아갈 때, 우리는 믿음의 역사를 이룰 수 있고,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2. 사랑의 수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으로 부터 바울이 감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두번째로 사랑의 수고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사랑의 수고가 넘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의 수고가 데살로니가 교회를 아름다운 감사의 교회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은 아름다운 교회를 만드는 아주 큰 힘입니다.

우리는 육아에 지친 엄마의 조는 모습에서 아름다운 희생과 수고를 느끼게 됩니다. 이 수고를 먹고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게 됨을 압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을 다해 수고하는 사람들로 인해 아름다운 교회가 세워집니다. 주일 1부 예배부터 4부 예배 시간까지 좁은 중보기도실에게 중보기도를 하는 분들,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주차봉사를 하시는 분들, 그 중에는 기업을 이끄는 사장님도 계시고, 기업에서 중역으로 일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의 희생과 수고로 우리 교회가 아름답게 세워져 갑니다. 

언젠가 한번 소개를 드렸던 이야기입니다. 주일 학교에 말썽꾸러기 아이로 낙인 찍힌 아이가 있었습니다. 봉사를 하시는 주일학교 선생님들 조차도 그 아이라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한 선생님이 주일 학교 교사로 오셨습니다. 그녀는 이 말썽꾸러기 아이의 생활기록부를 살펴보았습니다. 

1학년 : 미래가 보입니다. 그러나 가정 환경이 불우한 편입니다.

2학년 : 조용한 아이입니다. 조금 폐쇄적입니다. 어머니가 불치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3학년 : 학업성취도가 떨어집니다. 금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아이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4학년 : 미래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가출했고, 현재 이모의 손에서 자라고 있는데, 극심한 학대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 아이의 개인교사가 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성탄절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선생님을 위해 성탄선물을 준비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쓰다만 향수와 싸구려 가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가지고 왔습니다. 아이의 엄마가 쓰던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다른 아이들이 놀렸습니다. 그러자 이 선생님은 "선생님은 세상에서 이 향수가 제일 좋다" 그리고 "이 목걸이도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그 선생님은 이 아이에게 사랑의 헌신을 했습니다.

6년이 지났습니다. 어느날 아이에게서 선생님에게 편지가 왔습니다. "사랑하는 톰슨 선생님, 고등학교 졸업을 가장 먼저 선생님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선생님, 저 반에서 2등으로 졸업했습니다"

다시 4년이 지났습니다. 아이에게서 또 편지가 왔습니다. "사랑하는 선생님, 저 과 수석으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또 다시 4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편지가 왔습니다. "사랑하는 선생님, 제가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습니다. 멋지죠? 이제 결혼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선생님, 제가 어머니가 안 계신 것 알고 계시죠? 그래서 선생님에게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날 제 어머니의 자리에 앉아주세요. 선생님은 저에게 어머니이십니다"

사람을 가꾸는 가장 중요한 힘, 그것은 사랑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다음 세대를 향한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 사랑의 수고를 하나님이 보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3. 소망의 인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국 극동지방에 모소대나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나무는 첫 4년 동안은 많이 자라야 3Cm 정도 밖에 자라지 않습니다. 그런데 5년 째부터는 하루에 30Cm씩 자랍니다. 큰 것은 15m까지 자랍니다. 영화 속에서 우린 이렇게 자란 중국의 울창한 대숲을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이 대나무는 첫 4년을 뿌리를 내리는데 온 힘을 쏱습니다. 그리고 5년 째부터 뿌리의 응집력으로 놀라운 성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대나무 주인이 4년이 지나기 전에 참지 못하고 실망하여 이 대나무를 파 버린다면 울창한 대나무 숲은 구경도 못하게 됩니다. 주인의 소망과 각고의 인내로만 울창한 대숲이 만들어집니다. 

홍콩에 가면 도풍산이라는 사찰이 있습니다. 절이지요. 이 도풍산에 복음을 전한 노르웨이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이 선교사는 도풍산에 복음을 전하기로 작정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고민을 한 그는 포기하지 않고 불교서적을 공부한 후 다시 도전을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실패했습니다. 결국 그는 머리를 깎고 승려복을 입고는 그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 들어간지 32년 만에 그곳 스님 70명에게 전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사찰에서 교회가 되었습니다. 도풍산 지붕에는 "성전"이라는 팻말이 붙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까지의 과정은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를 파송한 본부에서 그가 변절을 했다고 여겨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절대 변심한 것이 아니니 끝까지 기다려달라고 하면서 32년을 버텨낸 것입니다. 이 선교사님의 인내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하나님을 움직여 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어떤 분의 사무실에 '빈 배' 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단순하고 보잘것 없어 보이는 이 그림이지만, 주인은 그 그림을 보물처럼 아꼈습니다. 그 그림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었습니다. "반드시 밀물이 밀려오리라. 그 날 나는 바다로 나아가리라" 이 믿음이 있는 그에게 좌절이 다가올 수 있겠습니까? 소망의 인내는 언젠가는 밀물이 밀려오게 될 것입니다.

한 남자가 자녀를 동네 놀이터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 놀이터는 누추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자기 자녀가 그런 누추한 놀이터에서 노는 것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는 좀 더 근사한 놀아터를 만드는 것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점차 믿음으로 공원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디즈니랜드입니다.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세계 모든 아이들이 즐겁게 뛰어놀 수 있는 공원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가 하던 꿈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결국 완성이 되었습니다. 바로 디즈니월드입니다. 디즈니월드가 완성되고 개막을 할 때, 사회자가 축하메세지를 미망인인 디즈니 여사에게 날렸습니다. "디즈니 여사님, 월트 디즈니 씨가 이 개막식을 보았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아쉽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디즈니 여사가 감사 인사를 드리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아까 하신 분의 축하의 말씀을 정정해야 하겠습니다. 제 남편은 이미 디즈니월드를 보았습니다. 그분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디즈니월드가 있었고 그 디즈니월드를 보며 살았습니다"

믿음으로 바라보고, 헌신으로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믿음으로 바라보면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을 수 있고, 소망의 인내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비전만큼 살고 기도만큼 이루며 삽니다. 비전을 품고 기도할 때, 주가 일합니다. 

[주가 일하시네] 를 찬송하며 오늘 예배를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날이 저물어 갈 때

빈들에서 걸을 때

그때가 하나님의 때

내 힘으로 안될 때

빈손으로 걸을 때

내가 고백해 여호와이레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주께 아끼지 않는 자에게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신뢰하며 걷는 자에게

우리 모인 이곳에

주님 함께 계시네

누리네 아버지 은혜

적은 떡과 물고기

내 모든 걸 드릴 때

모두 고백해 여호와이레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주께 아끼지 않는 자에게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신뢰하며 걷는 자에게

신뢰하며 걷는 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