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002_설교정리_우리가 사모하는 공동체 (8)_하티크바(소망)의 비전 [계 22:20~21]
○ 말씀전문
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 설교요약
하티크바는 히브리어로서, 이스라엘의 국가 제목이기도 합니다. 그 뜻은 '소망', '희망'입니다. 그 국가의 내용을 보면
"이 마음에 유대인의 영혼이 여전히 갈망하는 한,
저 멀리 동방의 끝을 향하여 시온을 향하여 바라보고 있는 한,
우리의 희망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네
2천년 간 이어져 온 그 오랜 희망은
우리의 땅에 속박 없는 나라를 세우리라는 그 희망,
시온과 예루살렘의 그 땅에"
아랍국가들에서는 이 곡이 금지곡이 되어 있지만,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의 소망의 마음이 담겨진 곡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소망을 담아 국가로 부르며 살아가는 것처럼, 이 소망과 희망은 우리들도 추구해야 할 중요한 삶의 한 요소입니다.
다니엘 튜터는 그의 저서 [익숙한 절망 불편한 희망]이라는 책에서 '안된다'라는 절망의 단어도 학습 효과가 있어서, 그 말을 자꾸 되뇌이면 어느 사이엔가 우리에게는 '희망'이라는 단어 조차 불편하게 다가오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절망이라는 단어 보다는 희망을 품고, 희망을 말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럼 하티크바 (소망) 공동체의 비전을 품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디에 소망을 두어야 할까요?
1.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티크바에서 정관사 '하'를 뺀 '티크바'는 '노끈'이라는 뜻입니다. '서로 꼬아 한데 결합시키다' 라는 의미입니다. 노끈을 구성하고 있는 실은 하나로 떨어져 있으면 무력하지만, 꼬아지면 든든한 밧줄이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하나님과 떨어져 있으면 무력한 자가 되지만, 하나님과 붙어 있을 때 소망이 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근거가 성경 여기 저기에 있습니다. 시편 42편 11절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쌍둥이 시편이라고들 부르는 43편 5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마음에 낙심이 있는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언젠가 한번 소개해 드렸던 것으로 기억됩니다만, 대기업에 다니다가 갑자기 퇴출 당한 한 집사님의 상담 내용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 분은 직속상사로 인해 실직을 당하셨습니다. 나쁜 소식은 더 빨리 전해진다고, 이 분의 실직 소식은 사외의 친구들에게도 급속히 전해졌던가 봅니다. 가깝게 지내던 옛 친구들 조차 부담스러운지 만나주지도 않을 뿐더러 아예 전화도 피하는 듯 했습니다. 젊은 나이에 실직한 부끄러움으로 아내에게도 얘기를 할 수가 없어서, 출근 시간이 되면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갈 데도 없고 해서 교회 기도실로 갔습니다. 기도 중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앞에서 말씀드린 시편 42편 11절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진짜 소망으로 다가왔고 그는 하나님을 소망으로 굳게 붙잡았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자 그 아픈 소식을 아내에게도 털어 놓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는 사이, 회사에서는 난리가 났나 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일 잘 하던 사람이 갑자기 안 보이게 되자 사장이 연유를 알아보라고 지시를 했고, 그 상사의 비리가 들통이 나 그 상사가 쫓겨난 자리로 이 집사님이 복직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낙심이 있을 때, 이 집사님은 하나님을 소망으로 붙드셨습니다.
에드워드 모토 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양철을 두드려서 가구를 만드는 자였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자신의 삶에 무의미함을 느끼고 매사에 불평과 불만만 쌓여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길을 가다가 작은 예배당을 보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의 모습이 어떻게 변하는지, 우리는 그의 일기장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일기장에 쓴 내용 일부입니다. "내 망치는 이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내 눈에 생기가 돌고 내 마음 속에 생수가 솟으니 이는 예수님이 내 마음에 오신 증거다. 나는 진정 거듭났다" 똑 같이 양철을 두드리는 삶이 계속 되었지만 그의 삶은 기쁨과 감사가 있고 행복이 있는 삶으로 변했습니다. 예수님을 소망으로 두고 만나면 이런 행복이 찾아옵니다. 우리도 그런 삶이 되기를 소망해야 하겠습니다. 그는 말년에 자기의 사업을 접고 작은 예배당 하나를 짓고는 남은 것을 다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어느날 자기가 지은 예배당 언덕 너머에서 그 예배당을 바라보고 있는데 작은 시상 하나가 머리에 떠 올랐습니다. 그것을 노트에 적어 만든 것이 우리가 애창하는 찬송가 488장입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시편 121편 1절과 2절이 생각나게 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우리가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는 첫 번째 소망은 하나님입니다.
2. 십자가의 복음에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우리가 두어야 할 소망 첫 번째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복음의 소망입니다. 바울도 골로새서 1장 23절에서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라며 이 복음의 소망을 역설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석학자요 목회자였던 그가 붙잡았던 것, 그 소망이 복음의 소망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지금 전도폭발훈련 과정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주일 예배가 끝나고 나면 교육훈련이 진행됩니다. 지난 주는 훈련생들을 위한 기도후원회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교에서 진행하는 재직회와 겹쳐져서 기도후원회에 참석을 못하고 모교에 갔습니다. 그런데 내내 마음에 부담이 있었는데, 기도후원회 사진을 받아보고는 안도의 숨을 내어 쉬고, 가슴 뭉클함을 느꼈습니다. 주일 예배로 지친 오후 시간에, 힘든 훈련을 받는 훈련생들의 열정에도 감사하지만, 만사 제켜두고 나와 그 훈련생들을 위해 기도하는 기도 후원자들의 모습을 보고, '아~ 우리 교회에 희망이 있구나'하는 가슴 뭉클함을 맛보았습니다. 복음에 소망을 두고 장기간 훈련을 받는 훈련생들, 그리고 그들을 지원하는 기도 후원자들이 바로 우리 교회의 사명이요 미래의 소망이 아니겠습니까?
로마서는 박사학위 논문이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명 서신입니다. 그 로마서의 처음 부분인 1장에서 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4,15절) 라며, 간절한 소망은 복음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I am eager to preach the gospel. 로마교회는 이미 있던 교회입니다. 복음 위에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기를 쓰고 복음을 강조했던 것은, 로마의 박해 가운데서도 가장 힘이 되는 것이 바로 복음이요 그 복음의 능력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다시 건강하게 될 방법은 복음 밖에 없습니다. 옥한음 목사님은 로마서 강해를 통해 "역사가 오래 된 교회일수록 복음이 죽어 있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교회일수록 복음의 메시지가 너무나 힘을 잃어버린 것을 본다. 교회 안에서 영적으로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조사해 보면 예수 믿은 지 오래된 사람들이다. 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진짜 교회 안에 있다. 십자가 앞에서 다시 깨어져야 할 사람이 교회 안에 있고, 하나님 사랑 앞에 굳고 교만한 마음이 녹아져야 하는 사람이 교회 안에 있고, 예수의 이름 앞에 자기 자신이 산산 조각이 나는 은혜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 교회 안에 있고, 다 안다는 마귀의 생각, 또 그 말한다는 음성을 뿌리 치십시오. 우리 모두에게는 복음의 감격, 구원의 감격을 새롭게 하기 위해 다시 복음을 새롭게 들어야 합니다" 라고 역설하셨습니다.
교회에 다니면 남에게 전도를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들은 복음을 듣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그 들은 복음을 소망으로 삼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에게 주신 복된 소식임을 단단히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를 개척한 지 5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다음 5년을 위해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복음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비전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우리 모두의 소망으로 붙들고 새롭게 나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다시 오실 주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첫 번째 소망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붙들어야 할 두 번째 소망은 십자가 복음입니다. 이제 마지만 세 번째 붙들어야 할 소망, 그것은 '재림의 주님'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는 헬라어로는 '아멘 에르쿠 퀴리에 이 예수'입니다. 우리가 평소 자주 얘기하는 마라나타는 아람어입니다.
초대교회사를 보면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1세기 초대교회는 능력 있는 교회, 생명력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소수의 사람들이었지만 로마를 복음화 했고, 세계를 살려냈습니다. 그 생명력의 근원은 바로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였습니다. 그들은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늘 '마라나타, 주께서 다시 오십니다'라고 인사했습니다" 혹독한 핍박 속에서도 초대교회가 살아남은 힘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 소망이 이 믿음이, 성경도 없었던 그때의 박해를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이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7절에서는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광의 소망은 다르게 표현하면 영원한 소망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소망은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소망입니다. 이 소망이 있으면 자기 욕심으로 살지 않습니다. 이 소망이 확실하면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한 가수의 찬양을 듣고 그 감성에 전율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바로 소향이 부른 마라나타입니다. 그녀는 책 하나를 내었는데 거기에 자신이 받았던 인터뷰에서 한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인지하며 살아가는 성도와 아닌 성도들의 삶은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결코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습니다. 주위 사람들과 화해하고, 조금이라도 더 가치 있는 것을 바라보기 위해 애쓰며 힘씁니다. 마치 그것처럼 우리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것을 인지할 때, 조금 있으면 주님이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산다면,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고 주님이 명령하신 바를 행하며 거룩함 가운데 살 게 될 것입니다"
소향이 부르고 고형원님이 작곡한 마라나타는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땅의 모든 끝 모든 족속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모든 열방이 주께 돌아와 춤추며 경배하게 하소서
우리 주님 다시 오실 길을 만들자
십자가를 들고 땅 끝까지 우린 가리라
우리 주님 하늘 영광 온 땅 덮을 때
우린 땅 끝에서 주를 맞으리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그분이 다시 오셨을 때 따뜻하게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분께 소망을 두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