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626_설교정리_내가 만든 신 (3), 사랑 [창 29:16~20]
○ 말씀전문
[창세기 29장 16절~20절]
16 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17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18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19 라반이 이르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20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 설교요약
[반지의 제왕]이라는 영화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 영화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고나 할까? 아니면 가장 혐오스러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골룸이 아닐까 싶습니다. 말라비틀어진 그의 몰골을 보면 어안이 송골한 마음이 들 것입니다. 절대반지만 있으면 인생이 행복하고 인생이 의미있어질 것이라 생각한 골룸의 절대반지에 대한 집착, 그 집착으로 인해 우리에게 혐오스러운 모습으로 변해버린 그 모습을 보면서 집착이 얼마나 무서운 우상인가를 깨닫게 합니다.
비단 절대반지와 같은 특별한 물건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저것만 있으면 행복하겠는데, 저것만 있으면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게 되겠는데' 싶은, 그것도 우리가 일상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집착 같은 우상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사랑은 원래 아름답고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왜곡 되어지면 집착이 됩니다.
그럼 오늘 야곱과 레아의 사랑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1. 사랑과 집착이 우상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한 집착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야곱입니다. 야곱의 라헬을 향한 사랑은 과히 집착에 가깝습니다. 야곱은 당시 일반인들이 감당하는 결혼지참금 보다 무려 네 배가 넘는 배상을 지불하고도 라헬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무려 7년간을 외삼촌 집의 머슴생활을 자처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1~2년간 봉사하면 되었지만 그는 무려 7년을 봉사하겠다고 했습니다. 아마 그 배경에는 삶 속의 공허함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형으로부터 장자권을 빼앗으려다 형으로부터도 배척되고, 부모님으로부터도 외갓집으로 피신하라는 책임회피적은 냉정함을 느꼈습니다. 그 공허함 속에서, 라헬만 얻으면 자기 인생이 다시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야곱의 그 사랑의 결핍이 집착이 되었고, 결국은 우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또 사랑을 집착으로까지 가져한 사람은 레아였습니다. 그녀는 동생 라헬에 비해 못생겼고 심한 근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늘 동생과 비교되면서 자라왔습니다. 그녀의 마음 속에는, 부모로부터의 배신감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7년 더 세경을 받으려고, 자기 동생 대신 자기에게 야곱의 신방에 들어가라고 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는 싫든 말든, 이왕 아버지의 강권으로 야곱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의 라헬에 대한 사랑을 자기에게로 돌리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잘 해결되고 행복한 살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부모로부터 천시를 받은 그녀의 마음의 공허함이 야곱만을 바라보는 집착을 갖게 한 것입니다. 그 집착이 아예 우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에게도 레아와 같은 똑같은 공허함, 채워지지 않는 결핍이 있습니다. 그것이 점차 집착으로 변해 갈 수 있습니다. 원래는 선하였던 것이 본의 아니게 집착으로 변질 될 수 있는 결핍이 있습니다. 돈, 저것만 가지면 평생 호화롭게 살 수 있겠는데 라는 착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선의의 것도 우상이 될 정도로 집착할 수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 외에는 집착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2. 우상을 뛰어넘는 신앙의 성숙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심령의 공허함으로 인해, 선한 것에도 과한 욕심을 내어, 집착으로 변질된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그 공허함을 메우려다가 과도한 집착을 갖게 될 수도 있음을 깨닫고, 이를 지혜롭게 잘 극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애서 가장 가슴 아픈 사람은 레아있습니다. 성경 속에서, 가장 남편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랑의 대표적인 본보기입니다. 게다가 그녀는 부모로부터도 천대를 받았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Leah had weak eyes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라헬에 비해 못나고 부족한 딸이라는 이유로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결혼에서도 라헬에 앞서 치워야 하는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비참하고 수치스럽고 모욕감으로 점철된 그녀의 마음을 엿볼수 있겠습니다. 한마디로 부모님으로부터 버림받고 남편으로부터도 외면받은 그녀는 어떻게 하면 남편의 마음을 라헬로부터 자기에게로 돌릴 수 있을까에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들만 낳게 되면 남편의 마음을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집착이 32절부터 34절까지 나타나 있습니다.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레아의 이름의 뜻은 '지치다, 피곤하다' 입니다. 이름처럼 그녀의 인생은 이 집착같은 우상으로 인해 지치고 피곤했습니다.
우리도 지치고 피곤하고 탈진해 가는 삶에서 이런 환경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이것이 사랑인지 집착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군가 사람과 집착의 차이에 대해 정의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집착은 자기중심이고 잃을까봐 두려워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생각하고 어떻게 도울까를 생각합니다.
집착은 봐주는 게 많지 않고 따지는 게 많습니다.
사랑은 봐주는 게 많고 따지는 게 별로 없습니다.
집착은 '왜 나를 힘들게 해?'
사랑은 '어떻게 도와줄까?'
집착은 오래 된 습관이며 저절로 행하게 됩니다.
사랑은 연습이며 수행입니다. 평생숙제입니다.]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은 당연히 집착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건강한 가정을 위해서도 노력이 필요하고 헌신이 필요하듯 내 삶을 위해서도 진정한 사랑을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런 피곤한 삶, 집착의 삶을 산 레아는 그 집착으로 인해 무너지지 않고 다행히 다시 일어섭니다. 35절에 레아의 다시 일어섬, 결핍과 집착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는 영적 성숙을 보여줍니다. 35절입니다.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This time I will praise the LOAD. 이 35절부터의 레아에 대한 기록에는 더 이상 남편 야곱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여호와만을 찬송합니다. 남편을 향한 집착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하나님 여호와가 들어와 앉았습니다. 이처럼 집착의 처방약은 하나님입니다. 이 처방을 통해 레아는 건강하게 다시 일어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착적 사랑이 아니라 건강한 사랑은 하나님 여호와께 있습니다. 그것을 알 때 우리는 남편을, 아내를 집착적으로 사랑하지 않게 되고 건강하게 사랑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성숙에 해당합니다. 그 성숙을 이루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우리의 우상은 진정한 생명을 만날 때 깨어짐을 알아야 합니다.
레아는 유다를 낳은 후 하나님께 집중합니다. 유다가 누구입니까? 유다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분입니다. 메시아의 족보가 발원한 곳입니다. 마태복은 1장 3절부터 16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3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8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9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10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11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12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13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14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15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16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의 발원지 유다를 낳은 후 레아의 우상은 깨어졌습니다. 레아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자기 땅인 이땅에 오셨지만 다들 그분을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헤롯 왕은 그를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곳에 오신 이유는 세상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섬기고 사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없다고 여겨지는 우리의 삶에서 우리는 우리의 친구가 되고 위로자가 되시고자 오신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의 인생은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집착을 벗어나고 우상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본교에서 섬길 때 알게 된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남편이 젊은 나이에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일을 당하신 후 아내 집사님은 너무나 힘들어 하셨습니다. 무기력하고 사람들 만나는 것도 피하였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집사님이 많이 회복된 모습을 보고는 조심스럽게 여쭤보았습니다. 그러자 집사님이 웃으시면서 간증하셨습니다.
"목사님, 제게 남편이 우상이었어요. 전 남편이 좋아하는 것이면 뭐든 다 좋아했습니다. 남편의 취미, 운동, 음식..., 심지어 교회까지 같이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말 세상에 아무 것도 없고 나만 있는 것 같았습니다. 자식도, 돈도, 집도 다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주님이 저를 찾아와 주셨고, 저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남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제가 그때 알았습니다. 주님이 저의 친남편이고, 나의 신랑이고, 친구이고, 참된 생명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남편이, 또 아내가 가장 소중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지만 그 남편, 그 아내가 채워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 채워줄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은 채워줄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친구가 되고 동행해 주셔야 합니다. 참 생명이신 이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우리의 우상이 깨어집니다.
사람들은 돈이 있어야 세상에서 제대로 숨쉬고 어깨 펴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야만 제대로 호흡하며 살 수 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제대로 호흡하며 사는 것은 진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아무리 소중한 남편일지라도 결코 내 생명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이 말씀을 붙잡고 나아가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