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508_설교정리_내 이름은 아버지입니다 (삼하 18:31~33)
○ 말씀전문
[사무엘하 18장 31~33절]
31 구스 사람이 이르러 말하되 내 주 왕께 아뢸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하니
32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 설교요약
인터넷에서 퍼졌던 [나의 이름은 아버지였습니다] 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나의 이름은 남자입니다. 남자는 그래도 되는줄 알았습니다. 식구들이 모두 모여 기다려도 일이 있으면 늦어도 되는줄 알았습니다. 아이의 생일은 기억 못해도 친구와 한 약속은 어김없이 지켜야 의리있는 사나인줄 알았습니다. 가정의 소소한 즐거음 보다는 직장과 조직에서의 성공이 더 위대한줄 알았습니다. 남자는 그래도 되는줄 알았습니다. 그래야 진짜 남자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나의 이름은 아버지였습니다. 자녀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였습니다.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주길, 다정한 말 한 번 건네 주길 바라는 아버지였습니다. 나의 이름은 남편이였습니다. 퇴근하면 곧장 돌아와 든든한 자리를 지켜주길 바라는 남편이였습니다. 아내가 정성들여 만든 반찬을 함께 먹어주고 바깥에서 있었던 일을 소곤소곤 이야기 하며 언제나 친구같이 있어주길 바라는 남편이였습니다. 나의 고운 아내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바로 그 남편이였습니다."
성경이 말해주고 있는 아버지의 의미는 어떤 것인지 오늘 짧은 본문을 통해 느낄 수 있습니다. 아버지란 어떻게 보면 무섭고 두려운 존재, 어려운 존재였던 사람도 있고, 편안하고 좋은 관계였던 사람도 있겠지만, 밖으로 보이는 것과는 또다른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아버지란 어떤 존재인지를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느끼고 깨닫게 됩니다. 오늘 어버이날을 맞아 내 아버지에 대한 본질을 이해하고 감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우리 모두는 점점 아버지의 자리로 옮겨가고 있음을 인식하고, 나는 어떤 아버지로서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지도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그럼 우리가 성경이 가르치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인식하며 배워야 할 것은...
1. 자식을 이길 수 없는 존재가 아버지입니다.
다윗의 인생에서 가장 버겁고 힘든 전쟁을 꼽으라면 아마도 골리앗과의 싸움을 들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싸움이 아니라 다섯째 아들인 압살롬과의 전쟁이 다윗에게 있어서는 가장 힘든 전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난 싸움이었지만, 아버지인 다윗에게는 상대하기조차 마음이 찢어지는 싸움이었음이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본장 5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지휘관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 압사롬과의 전쟁에 나가는 장수들을 향해, '나를 위하여' 아들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고 당부를 합니다. 목숨을 살려두라는 당부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압살롬은 전사를 합니다. 승리의 소식을 들고 달려온 구스 사람은 상응하는 상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다윗의 반응은 슬픔이었습니다. 그 절규하는 말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이것이 아버지의 본심입니다.
지금 상영되고 있는 [태종 이방원]이라는 사극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입니다. 그 이방원이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포은 정몽주를 척살했습니다. 그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는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이성계는 차마 아들을 죽이지 못했습니다.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이길 수 없는 아버지였기 때문입니다. 이방원은 자신이 뛰어나서 아버지를 이기고 왕위에 올랐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난 후 그는 아버지를 찾아가 무릎을 꿇습니다.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가 자식을 이길 수 없는 존재라서 아들을 위해 포기하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1992년에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제 아버지는 제가 신학교에 가는 것을 극구 반대하셨습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난 장문의 편지를 남기고는 집을 나와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나는 내 신앙이 좋아서 반대하는 아버지를 이기고 신학교에 입학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남다른 나의 신앙심이라고 스스로에게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제 아버지는 결국 내가 목사의 길을 가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허락이 내가 생각했듯 과연 내 신앙심으로 인해 얻어진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제 아버지가 자식을 이길 수 없음을 아시는 아버지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공공의적]에 나오는 조규환은 돈 때문에 아버지까지 죽이는 패륜아였습니다. 그가 아버지를 죽이다가 손톱이 잘리는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어머니는 나중에 아들이 살인자로 확인될 수 있겠다 싶어서 그 손톱을 입에 넣고 삼켜버립니다. 그는 그런 어머니까지 죽이게 되고, 그 어머니가 부검을 당한 결과 그녀의 몸 속에서 발견됩니다. 패륜아이지만 어머니는 역시 자식을 이길 수 없는 부모였습니다. 자식의 문제를 내 문제로 짊어지고 가려는 것이 아버지요 어머니입니다.
혹시 우리가 아버지를 이겼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식을 이길 수 없는 아버지라고 깨닫게 된다면 아버지를 찾아가 감사의 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내가 내 자식을 내 뜻으로 키우겠다고 싸우고 있는 사람이라면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결국은 자식을 이길 수 없는 아버지의 자리로 가게 될 것임을 깨닫고, 합심하여 선한 길을 찾아가길 바랍니다.
2. 자식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도하는 존재가 아버지입니다.
성경에서 자식을 위해 애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마가복음 5장 22절과 23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회당장 아이로입니다.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회당장이라면 사회적으로 신망이 두텁고 존경받는 사람입니다. 그런 아이로가 딸을 위해 젊은 예수님 발 아래 엎드렸습니다. 당시 사람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종이나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로는 자식을 위해 체면도 체통도 다 버렸습니다. 이것이 자식을 위한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는 귀신들린 자식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21절부터 24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자식을 위해 호소하고 호소할 수 있는 존재, 그는 바로 간구하는 아버지입니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 한 경제신문에 올라온 사진이 있었습니다. 지하철 좌석에 앉아 졸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 종일 일에 시달려서 피로와 스트레스가 어깨 위를 무겁게 누르고 있는 지친 모습, 그것이 이 땅 가장의 모습이고 우리들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그 남자는 힘에 부치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자식들과 아내를 위해 그러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늘 내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고, 마음 속으로 행복하기를 기도하며 살아갑니다.
김장한 목사님의 큰 아들인 김요셉 목사님의 [삶으로 가르치는 것만 남는다]라는 책에는 아버지와의 사이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 김장한 목사님이 미국에 출장을 오셨다가 자신의 집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습니다. 단 하루였지만 그에게는 부담스럽고 불편한 시간이었습니다. 밤을 보내고 일어나 보니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디 계신가 두리번 거리고 있을 때, 화장실 문 틈으로 한줄기 빛이 비춰나고 그 속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살며시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변기 뚜껑을 닫고는 그 위에 성격책을 놓고, 변기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자식인 자기를 위해 열심히 기도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을 지켜본 그는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내가 아버지처럼 훌륭한 목사가 될 수는 없을지라도 저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작정을 했습니다.
자식 앞에서는 엄한 아버지일지라도, 자식이 보지 않는 곳에서 수없이 기도하는 것이 아버지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런 아버지를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최고의 선물로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내 자녀를 위해 늘 기도하는 아버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자식을 기다리는 존재가 아버지입니다.
자식이 아버지에게 상속분을 먼저 달라는 것은 마치 아버지에게 빨리 돌아가시라고 하는 것과 매일반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탕자가 그랬습니다. 그런 아들이 불안불안해서 아버지는 수없이 거절하고 말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식을 이길 수 었는 아버지는 탕자에게 상속분을 미리 주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아들이 분명 실패하고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기도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20절부터 23절입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아들이 거지꼴이 되어 돌아오자 아버지는 멀리서도 알아보고 버선발로 뛰어가 아들을 끌어안았습니다. 늘 기다리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말씀 중에 '살찐 송아지'라는 말이 나옵니다. '톤모스콘'인데 영문으로는 Bring the fattened calf라며 정관사 the가 붙어 있습니다. '살찐 그 송아지'라는 의미입니다. 아들이 돌아올 때를 위해서 키우며 준비하고 있었던 그 송아지 라는 의미입니다. 자식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을 충분히 읽을 수 있습니다.
목사님 설교말씀을 들으면서 문득 내 옛날 기억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삼남삼녀인 육남매 중 넷째입니다. 위로 형님과 두 분 누님이 계시고 아래로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습니다. 여자 자매들은 다 출가를 하였고, 형님과 남동생은 부모님이 계시는 주변도시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그들과는 자주 만나는 관계였고, 명절 때도 당일 아침에 차례를 지내러 왔습니다. 저는 멀리 떨어져서 직장에 다니고 있어서 자주 부모님을 만나지 못했고, 명절 때는 늘 하루 전에 귀향을 했었습니다. 어느 추석 전날도 새벽 4시에 출발했지만 길이 막혀서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고향에 도착했습니다. 우리 고향 마을은 마을 입구에서 신작로를 바라보면 아득하게 보입니다. 아마도 1.5~2Km정도 될 것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도착하자 입구 느티나무 아래에서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들어가니, 차례 지낼 음식을 열심히 준비하시던 어머님이 웃으면서 하시던 말씀, "너그 아부지는 아침부터 열 번도 더 느티나무 아래로 나가 너거들 오는지 보곤 했다". 종일 우리를 기다리시던 아버지, 그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누군가의 시에서 본 문장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어머니는 열 번 걱정하는 말씀을 하시지만, 아버지는 열 번 현관을 쳐다보신다". 다음은 언젠가 본 아버지에 대한 글입니다.
"아버지란 돌아가신 후에야 보고싶은 사람이다. 아버지가 무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체면과 자존심과 미안함 같은 것이 어우러져서, 그 마음을 쉽게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웃음은 어머니의 웃음의 그 때 쯤 농도가 진하다. 울음은 열 배쯤 될 것이다. 아들, 딸들은 아버지의 수입이 적은 것이나 아버지의 지위가 높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지만, 아버지는 그런 마음에 속으로만 운다. 아버지는 가정에서 어른인 체를 해야 하지만, 친한 친구나 맘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소년이 된다. 아버지는 어머니 앞에서는 기도를 안 하지만 혼자 차를 운전하면서는 큰 소리로 기도도 하고 주문을 외우기도 하는 사람이다. 어머니의 가슴은 봄과 여름을 왔다갔다 하지만 아버지의 가슴은 가을과 겨울을 오고간다. 아버지! 뒷 동산의 바위 같은 이름이다. 시골 마을 느티나무 같은 크나큰 이름이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줘도 줘도 늘 부족하다고 여기는 분, 떼를 쓰면 줄 수 밖에 없는 우리 하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그 아버지, 그리고 하늘 아버지를 이해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이 한 주가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