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10_설교정리_에케 호모, 이 사람을 보라 (막15:21~23)
○ 말씀전문
[마가복음 15장 21절~23절]
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 설교요약
영화 벤허는 처음엔 기독교가 거짓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기획된 영화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영화를 제작해 가면서 오히려 내용이 기독교를 증거하는 영화로 바뀌어 찬양으로 헌정된 영화가 되었다고 합니다. 주인공은 유다의 귀족이었으나 친구와 정적의 모함으로 인해 노예로 전락하여 평생을 분노와 증오로 살았습니다. 그러던 그의 삶이 어느 순간부터 이 분노와 증오가 사라지는 삶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가 영화 속에서 고백하는 말을 옮겨 봅니다. "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십자가 옆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말씀하셨을 때, 저는 그때 제 손에서 검이 떠나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검을 목숨처럼 여기는 검투사의 인생에서 평생 검이 없는 인생으로 살아가도록 한 그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십자가를 직접 매고 경험한 또 한 사람, 시몬에 대한 얘기입니다. 무거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던 그는 그때는 미처 알지 못하고 황당했을지 몰라도, 그는 이 경험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으며, 훗날 그의 자손들에게도 은혜의 삶이 주어졌습니다.
그럼 구레네 사람 시몬이 받은 은혜는...
1.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은 은혜입니다.
로마 법에는 징발권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발동되는 권한이었지만, 개인이 가지고 있는 물건이나 동물, 심지어는 사람까지도 강제로 동원할 수 있는 징발권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던 예수님이 다섯 번이나 처참하게 쓰러져 시간이 지체되자, 형 집행 시간을 넘기지 않기 위해 서두르던 병사들이, 마침 그때 가까이에 있던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이 징발권을 발동했습니다. 그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예수님 대신 매게 했습니다.
강제로 십자가를 맨 그는 머리로는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찌 보면 재수없는 저주의 경험으로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십자가를 지고 난 그날부터 왜 자신에게 그 짐이 지어졌을까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 예수님을 가슴으로 인격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자기 인생에서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였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자 그는 자기 아내와 아들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그 아들이 나중에 바울의 동역자가 됩니다. 본문에서 시몬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 부르고 있는데, 이 루포에 대한 기록이 로마서 16장 13절에 나옵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시몬이 경험한 이 은혜가 아들에게까지 이어집니다.
신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도 제가 목회자가 되는 것에 대해 아버지는 극구 반대하셨습니다. 비록 반대를 하셨지만 저에게는 마음 속으로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셨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가족들을 위해 정말 열심히 사신 분임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목회를 하더라도 인간적인 도리, 효도를 다하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반대에 불구하고 제가 신학의 길을 포기하지 못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제게 예수님의 십자가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습니다. 못질을 당하실 때의 예수님의 두 발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못을 갖다 대자 순간적으로 발을 살짝 피하시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당당하게 십자가를 감당하셨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때 예수님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얼마나 피하고 샆었는지 아느냐?" 그 말씀이 귀에 꽂히자 머리가 먹먹해졌습니다. 못에 박혀도 안 아프실 것이라 생각했던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이 아픔을 느끼는 분이신데, 그럼에도 자기 발을 내어주신 그 예수님을 보고는 반드시 신학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혔던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 이 예수님에게 나를 드려야 하겠다는 생각을 굳혔었습니다. 찬송가에 나오는 가사입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우리는 머리로는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나야 할 모습은, 삶으로, 마음으로, 가슴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시몬이 물리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 것으로 끝나지 않고, 가슴으로 그 십자가를 다시 졌던 것처럼, 이 한 주 가슴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 예배의 경험을 가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강함이 아닌 약함 가운데 주시는 은혜입니다.
시몬은 구레네라는 외곽지대에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곳은 우상숭배가 횡횡 했고, 황제 숭배가 심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폭동이 아주 잦았던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달갑지 않은 지역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정통과는 늘 벽이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지역 뿐만 아니라 시몬 자체도 정통 유대인과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1절에 보면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처럼 '니게르라 하는 시몬'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니게르 시몬이 바로 오늘 본문의 시몬입니다. 니게르는 영어의 니그로입니다. 즉 흑인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시몬은 핸디캡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지워졌다는 것, 그는 두고 두고 감사와 은혜였음을 고백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힘들고 어려웠던 일들이 지나고 나서 되돌아 보면 그것이 참으로 큰 은혜였음을 깨닫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 나도 지구촌교회에서 처음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우연히 친구가 맡고 있는 부서에서 교사 사역을 하게 배정을 받았었습니다.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잘 나가는 친구 밑에서 사역을 한다는 것이 결코 편안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힘듬이 오히려 나를 열심히 기도하게 했습니다. 주일 사역을 끝내고 나면 몸이 파김치처럼 피곤하지만 나는 밤 11시가 되면 골방을 찾아 기도했었습니다. 그때마다 주님은 1년은 아니더라도 하루나 일주일을 살 수 있게 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때 본 시가 아직도 생각이 납니다. "나는 들꽃입니다" 라는 시입니다.
'나는 들꽃입니다. 이름없는 들꽃입니다.
나는 들꽃입니다. 아프고 병든 들꽃입니다.
나는 들꽃입니다. 바람에 찢기고 벌레에 파 먹힌 들꽃입니다.
나는 들꽃입니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은 흔하고 흔한 들꽃입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다가와 겸손히 무릎을 꿇어시고
후레쉬를 터뜨렸을 때 드디어 나는 특별한 꽃이 되었습니다.'
주목받지 못하는 우리 인생,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와 주시고 만나주시고, 집사로 장로로 권사로 목자로 불러주신 은혜, 이 은혜가 얼마나 소중한 은혜입니까?
나의 약함 가운데도 주시는 이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이 한 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3. 우연이 아닌 섭리를 깨닫게 하는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하는 평범하면서도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똑같은 내용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이 단어는 이 마가복음에만 나와 있습니다. 아마도 마가가 깨달은 이 섭리의 원리 때문인 듯합니다. 그 단어는 바로 '마침'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단순히 이해하면 '우연히'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깊이 묵상해 보면 예수님이 쓰러지신 그곳에 마침 하나님이 시몬을 서 있게 하셨다는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가 그 길목, 거기에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18세기 독일에 ‘슈텐베르그’라는 유명한 화가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초상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한 절반정도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입니다. 그는 교회의 요청에 의해 예수님의 여러 모습을 담은 성화를 그리곤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돈을 벌겠다고 나체 모델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 화방에 그가 그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림이 놓여있었습니다. 모델 아가씨가 “왜, 저 사람은 저렇게 불쌍하게 나무에 매달려 있습니까?” 슈텐베르그가 아무런 감정과 생각도 없이 그것은 십자가라고 하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지금 죽으시는 장면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때 모델 아가씨가 심각하게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 죄라고요? 선생님의 죄도, 나의 죄도 대신해서 죽으셨단 말입니까?” “그렇고 말고”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 그 말이 그만 슈텐베르그의 마음에 큰 찔림이 되었습니다. 물론 슈텐베르그는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 때문에 대신 십자가를 지셨는가? 거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때부터 슈텐베르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또 성경을 부지런히 읽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서 두 주먹으로 눈물을 닦아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죄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 때문에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분의 고통이 나를 위한 고통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슈텐베르그에게 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슈텐베르그는 눈물을 흘리며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바로 그 그림이 “에케 호모” 즉 ‘이 사람을 보라’라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이 나중에 어떤 박물관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한 젊은 백작이 지나가다가 그 그림 앞에 멈추었습니다.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그 밑에 적혀 있는 “내 너를 위하여 나의 몸을 주었건만 너 나를 위하여 무엇을 주느냐”고 예수님이 안타깝게 물으시는 그 음성에 그의 마음이 찔렸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위해 이렇게 십자가를 지시며 고통을 당하셨는데 나는 지금까지 주님을 위해서 한 것이 아무것도 없군요. 주님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는 나의 몸을 주님을 위해 온전히 바치겠나이다” 눈물을 흘리면서 결심을 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진젠돌프 백작입니다. 기독교사에 한페이지를 장식한 사람입니다. 그는 모라비안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전 세계에 걸친 선교운동과 경건운동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그는 사재들 털어서 신앙인들을 돌보고 선교에 헌신한 삶을 살았습니다.
영국의 여류 찬송작가 하버갈도 이 작품을 보게 됩니다. 그녀는 이 그림으로 큰 영감을 받고 종이를 꺼내 그림 아래의 내용을 메모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메모를 까맣게 잊고 있다가 나중에 별난로의 불 쏘시개로 태웠는데, 이상하게 그 종이가 타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꺼집어내어 다시 보고는 기억을 되살렸고 깊이 묵상한 결과 찬송가 "내 너를 위하여"를 작곡하였습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넌 무엇 주느냐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넌 무엇 주느냐'
하나님의 섭리가 진젠돌프 백작을 '에케 호모' 앞에 서게 했으며, 찬송 작가 하버갈을 이 그림 앞에 서게 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패션오브크라이스트] 영화를 봤을 것입니다. 주연을 맡은 사람은 잘 나가던 영화 배우 짐 카비젤입니다. 그는 한 영화 감독의 베드신 제안을 단호히 거절한 적이 있는데, 이 점을 높이 산 멜 깁슨 감독이 그를 이 영화의 예수님 역으로 택했다고 합니다. Jesus Christ의 이니셜 JC와 짐 카비젤의 이름 이니셜 JC가 같은 점도 특이합니다. 그는 촬영이 없는 시간에는 목수 일도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목수였음을 기억하면 그가 이 역을 맡은 것도 우연이라고 만은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촬영을 마친 그가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그들은 날 사랑하지 않는다. 날 사랑하는 이들이 너무 적다. 그분의 피조물이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홀로이신 이유이다. 내가 맡은 역할을 통해 이러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어서 매우 복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주님, 제가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씀드릴께요. 그리고 이를 공개적으로 말할께요. 세상에서 어떤 평판을 받아도 상관없습니다.'" 이니셜이 같고, 목수라는 직업이 같다는 것을 우연이라고만 보지 않고, 그가 자신이 맡은 역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여겼기에, 그는 혹독한 촬영 환경을 기쁨으로 받아들였고, 주 사랑을 공개적으로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종려주일이 끝나고 고난주간으로 들어갑니다. 이 섭리의 마음으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함께 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그 모습 위로 떨어지는 한 방울 눈물, 바로 하나님의 눈물입니다. 우리를 향한 눈물이고 사랑입니다. 이사야 53장 4절과 5절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 은혜를 붙잡고 살아가는 고난주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고난주간이 되면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찬송이 있습니다. 앞에서 본 "내 너를 위하여"의 연장입니다.
'아버지 보좌와 그 영광 떠나서
밤 같은 세상에 만 백성 구하려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한없는 용서와 참사랑 가지고
세상에 내려와 값없이 주었다
이것이 귀중하건만 날 무엇 주느냐
이것이 귀중하건만 날 무엇 주느냐"
이 찬송의 물음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보는 고난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마음으로 만나고, 그 주님과 동행하며, 그 분의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가 되고, 그 분의 은혜가 나의 은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