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03_설교정리_주님, 나는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습니다 (롬 6:3~4, 갈 2:20)
○ 말씀전문
[로마서 6장 3절~4절]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설교요약
세계적인 복음전도자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의 인터뷰 대목입니다. "목사님, 수많은 나라와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지금까지의 사역 중에서 혹시 아쉬운 것이 있었습니까?" 그러자 목사님은 "나는 복음이 교회 밖에서만 필요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은 교회 안에 복음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목사님의 이 지적이 바로 우리를 향한 지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본문은 로마서를 통한 바울의 고백입니다. 로마서 1장 15절에서 그는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로마교회에 있는 성도들이 복음을 몰랐기 때문일까요? 로마교회는 복음의 토대 위에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거의 논문 수준에 달하는 이 로마서를 써서 보낸 것은, 그들로 하여금 고난의 핍박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새롭게 할 힘은 오직 십자가 복음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교회를 교회답게, 성도를 성도답게 하는 힘은 복음 안에 있습니다. 그럼 본문이 주는 복음의 레슨은...
1. 자아의 죽음에 대한 복음에 눈 뜰 수 있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목사님은 예배시간에 대표 기도자가 기도를 하고 나면, 혹 잘못된 부분이 있더라도 그냥 넘어갑니다. 그러나 이동원 목사님은 혹시 잘못 된 부분이 있으면 부르셔서 바르게 가르쳐주셨습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대표 기도를 하면서 "허물과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던 나를" 이라고 하자, 나중에 부르셔서 그 대목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를"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고 교정을 해주셨습니다.
6장 4절에서 말씀하셨다시피 우리 모두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때에 죽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장사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도 분명히 과거형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나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과거형으로 죽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로마서 6장 6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의 옛 사람, 즉 자아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자아가 죽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한 죄수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비록 살아는 있지만 감옥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는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를 "죄에 대해서 죽었다" 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한 남자가 결혼을 했습니다. 이제 그는 그 아내만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를 "그는 여인에 대해서는 죽었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아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내 자아가 예수님 십자가와 함께 죽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의지로는 더 이상 죄를 지을 수가 없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깨닫고도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 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대학교 다닐 때, 수련회에 가서 하나님께 감동되어 울고불고 하다가 집으로 돌아 온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일주일을 채 넘기지 못하고, 형과 다투고, 엄마와 다투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수련회를 통해 내 자아를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비로소 나는 내 속의 내 자아는 내 방법으로 내 의지로 죽일 수 있는 게 아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을 보겠습니다. 그는 '예수 십자가 죽음과 함께 내 자아도 이미 죽은 상태로 지금 살고 있다' 라는 것을 믿고 그렇게 선포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자아가 불쑥불쑥 머리를 들려고 하면 '내 자아는 예수 십자가와 함께 죽었다'를 되뇌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에 볼 일이 있어서 갔다가 주차장에서 차를 주차하려고 하는데 어떤 차가 손살같이 앞질러 가서 새치기를 하고는 먼저 주차를 하려고 했습니다. 보니 20세 정도의 젊은 사람이었습니다. 순간 부아가 치밀어서 "빵" 하고 크락션을 울렸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머리를 내밀고는 대뜸 온갖 육두문자를 써 가며 욕설을 해대는 것이었습니다. 내려서 한바탕 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 예수 십자가와 함께 죽었다며" 라는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10번 정도 되뇌이니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습니다. 그때 비로서 깨달았습니다. '아하, 이게 믿음으로 십자가를 선포하고 사는 삶의 모습이구나'
신앙은 이 말씀을 선포하고 내 삶을 선포한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아는 내가 죽일 수 있는게 아닙니다. 예수 십자가로만 가능합니다. 그것을 믿고 선포함으로 사는 것, 이 삶을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2.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함께 하심에 눈 뜰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6장 8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다음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Christ lives in me.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도 삶이 잘 안 바뀐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람 하나만 새로 들어와도 가정이 바뀔 수 있고, 공동체가 바뀔 수 있음을 봅니다. 문제는 바뀌겠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 자면서 몸부림을 많이 쳤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머리와 다리가 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내가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큰아버지께서 우리집에 오셨다가 제 방에서 함께 잔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다가 내 발가락에 뭉클거리는 것이 닿아있음을 느끼고는 얼른 일어나 보았습니다. 내 엄지 발가락이 큰아버지 입 안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어찌나 민망하든지, 그 이후는 몸부림은 커녕 거의 부동자세로 잠을 잡니다. 큰아버지가 우리집에 오셔도 바뀌는데, 예수님이 내 속에 있음을 알면서도 바뀌지 않는다면 그건 큰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진짜 내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바뀔 수 밖에 없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이긴 것이, 그 여인의 유혹이 약해서 였을까요? 아님 요셉이 여자에 대한 정욕이 특별히 약해서 였을까요? 한창 피가 끓는 나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자기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는 유혹이 너무 강해서 넘어질 수 밖에 없다고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한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음란물의 유혹을 벗어나기 어렵다고요? 음란물이 너무 강한 유혹으로 만들어졌기 떄문이라고요? 아닙니다. 누군가가 내 뒤에서 내가 음란물을 보는 것을 보고 있음을 안다면 음란물을 보지 않게 됩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보게 됩니다.
코로나 확진으로 1주일간 혼자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혼자 있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저는 이 시간을 오로지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으로 가져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주님! 거룩이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혼자 있을 때 나를 잘 바라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나는 깨달았습니다. 이 코로나의 시기에 목사인 내가 해야 하는 것은, 정말 혼자 되었을 때 온갖 걱정들을 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혼자 있을 때 나를 잘 바라보는 목사가 되는 것' 임을 깨달았습니다.
양이 이리를 이기는 방법은 몸집을 키우거나 싸움질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는 절대 이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주인이신 목자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려면 목자이신 주님과 함께 하는 것, 주님과 함께 함을 분명히 알 때 가능합니다. 세상도 이기고 영혼도 이길 수 있습니다.
3. 우리를 넘어서서 나의 복음에 눈 뜰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주는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의 입성을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그러던 그들이 단 일주일만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고래고래 소리질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무리 속에 있는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묵상한 본문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말씀 중에는 같은 것이 2개가 있고 다른 것이 1개가 있습니다. 같이 들어있는 것은 '죽었다'와 '함께'입니다. 다른 것은 주어로 하나는 '우리'라 표현하고 있고, 다른 하나에서는 '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에서는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해 우리라고 했지만, 갈라디아서는 바울 자신의 복음을 말하며 그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나'가 주어로 되어 있습니다.
내 신앙이 모태신앙이다 라든지, 내 부모님이 장로님이다 라는 것은, 내 신앙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자신에게 나의 십자가에 대한 선명한 고백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의 신앙 나의 고백만이 나의 십자가가 되고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지구촌교회에 있을 때, 이동원 목사님의 신앙이 내 신앙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대형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그 교회가 자기 신앙의 수준인 줄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고백해야 할 것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지금이 바로 다시 복음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이 말씀을 붙잡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복된 한 주가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