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213_설교정리_축복이 아닌 은혜를 구하라 (룻 2:8~11)
○ 말씀전문
[룻기 2장 8절~11절]
8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9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
10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11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 설교요약
지난주 예배를 통해 우리는 코로나의 광야를 승리로 지나기 위해서는 ① 사람이 사람을 만날 때 역사가 일어남을 깨달아야 합니다. ② 고난의 시기일수록 '왜' 보다는 '어떻게'에 집중해야 합니다. ③ 성공이 아닌 승리를 위해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라는 세 가지 레마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지금 중국에서는 동계올림픽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TV를 통해 우리 선수들의 선전하는 모습을 보고자 합니다. 지난 주에 받은 레마의 말씀 때문인지, 예선을 거쳐, 준준결승전, 준결승전, 결승전을 치루면서 들려오는 선명한 단어가 '승리'라는 단어였습니다. 올림픽에 나가기 위해 4년 동안 피땀흘려 기다려오고 이긴 그들에게 붙여주는 가장 큰 찬사의 단어는 성공이 아니라 승리였습니다. 4년간의 혹독한 훈련의 대가가 승리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코로나라는 혹독한 시련이 2년을 넘어 3년차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동계올림픽에서 승리를 얻는 선수들처럼 우리도 이 코로나가 끝나면 믿음의 승리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럼 우리가 코로나라는 환란을 이겨내고 승리하는 삶을 살려면...
1. 고난의 시기, 학습된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마틴 셀리그만은 개를 통한 일련의 자극 인센티브 실험이 자칫 개를 ‘학습된 무기력’에 빠뜨릴 수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특정 주파수의 소리를 들려준 다음 전기 자극을 가하는 행위를 반복하여, 소리가 들릴 때마다 개가 회피를 시도하는 회피학습을 하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러나 개는 일련의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해도 고통스러운 전기 자극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고, 곧 아무리 전기 자극을 가해도 그것을 피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는 실험의 목적이 무엇이든 어떤 개체가 부정적인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경우 에는 ‘학습된 무기력’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왠지 모든 것이 술술 잘 풀린다고 여겨질 때도 있지만, 반면에 뭘 해도 잘 안된다는 실패감에 놓일 때도 있습니다. 실패가 반복될 때 우리는 마음 속에 이 실패가 학습의 결과가 되어 쌓여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위 '학습된 무기력'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환경이 나쁠수록 이 현상이 발생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코로나 사태가 우리에게 학습된 무기력을 가져다 줄 수도 있는 시기임을 알고 더욱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룻의 경우, 다른 민족인 남편을 맞아 결혼을 했는데, 시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남편마져 잃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종족을 떠나 전혀 생소한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언뜻 보면 일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할 여지가 많은 상태였습니다. 학습된 무기력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르게 살았습니다. 움츠리고 앉아 있지 않고 이삭이라도 주우려고 나섰습니다. 그 룻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그녀가 들에서 줍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이삭을 줍는 것이었지만, 깊게 묵상해 보니 그녀가 줍고자 하는 것은 '희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독한 상황 속에서도 그녀는 무기력에 굴복하지 않고 희망을 찾아 일어선 것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무기력해지기 쉬운 우리도 룻처럼, 광야 같은 이 환경 속에서도 소망을 찾아 붙잡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한발을 내딛는 것이 어려운 줄 압니다. 학습된 무기력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음을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실패하지 않고 승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은 실패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소망으로 붙잡아서 승리하라는 것입니다.
70년 간이나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스가냐는 아직도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에스라 10장 1절과 2절입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여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70년 동안의 포로 생활 속에서 도저히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패매감, 절망감, 무력감 속에서도 우리에게는 아직도 소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코로나가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도 아직도 소망이 있다는 것을 굳건히 붙잡고, 코로나 이후에도 승리하는 자로 남을 수 있도록 무기력에서 벗어나는 한 주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성품이 말보다 더 크게 말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앤디 스탠리는 [성품은 말보다 더 크게 말한다]라고 했습니다. "성품이란 일신상에 어떤 대가가 따르더라도 하나님의 기준의 옳은 길을 가려는 의지이다. 우리가 평생 얼마나 많은 일을 이룰지, 우리가 남들이 알 만한 가치 있는 사람인지, 우리가 성공에 어떻게 반응할지, 삶의 불가피한 폭풍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와 같은, 우리에 관한 모든 것이 성품으로 결정된다. 성품은 하루 동안에 자라지는 않는다. 평생에 걸친 과정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속에서부터 만들고 빚으시려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 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룻이 남편을 잃고, 아직도 젊으니 네 새 삶을 위해 자유로이 떠나라는, 시어머니의 말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른 것, 그리고 그 시어머니를 위해 이삭 줍기라도 나선 것은, 그녀의 좋은 성품 탓입니다. 그런 성품이 보아스를 만나고 또 승리의 삶을 살게 된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녀의 또다른 성품이 10절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라며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성품을 보여줍니다. 그런 그녀에게 보아스가 11절에서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라고 합니다. 말은 드러나고 성품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품은 더 큰 소리로 사람들을 울리고 감동시킵니다.
직장에 들어갈 때 면접을 봅니다. 그 사람의 능력을 보고 대답을 통해 평가합니다. 하지만 현명한 면접관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성품을 캐치해 내려고 합니다. 직장에 들어갈 때는 능력이 좌우하지만 들어가고 난 후의 승리는 성품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능력으로 들어가더라도 성공하지 못하고 이상해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실력과 스펙에서도 나오지만 최종적으로 승리를 이루는 사람은 성품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식이 진정한 승리의 사람이 되게 하려면, 일류대학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성품을 기르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이 2022년을 성품을 단련시켜 승리하는 사람으로 자라가기를 축복합니다.
앤디 스탠리가 [성품은 말보다 더 크게 말한다]에서 주장한 내용을 좀 더 보겠습니다. "우리의 성품이야말로 우리의 참 모습이다. 우리가 평생 얼마나 많은 일을 이룰지는 성품에 영향을 입는다. 우리의 모든 인간 관계는 성품 때문에 잘 되기도 하고 깨어지기도 한다. 노력과 행운으로 얻은 재산을 우리가 얼마나 오래 지킬 수 있을지도 성품을 보아 가늠할 수 있다. 성품은 실패와 성공과 대우와 고통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결정짓는 내면의 각본이다. 성품이 미치는 범위는 우리의 재능, 교육, 배경, 인맥 보다 넓다. 그런 것들로 문은 열릴 수 있으나 일단 그 문에 들어선 후 어떻게 될지는 성품으로 결정된다"
3. 축복이 아닌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주에 보았던 이진희 목사님의 [가나안에 거하다]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광야를 지날 때는 다 은혜를 구한다. 그러나 가나안에서는 누구나 축복을 누리며 살고 싶어한다. 은혜와 축복은 다르다.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누릴 수 없다. 그러나 축복은 얼마든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다. 은혜는 생존과 관련된 문제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반면 축복은 불편함과 관련된 문제다. 축복을 받지 못해도 실 수는 있다. 다만 좀 불편하게 살아야 할 뿐이다. 가나안에서는 편안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편안하다고 평안한 것은 아니다.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은 축복이다. 그러나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은 은혜다."
룻기가 강조하는 단어는 은혜입니다. 룻이 보아스를 만나게 된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성경은 축복이라 하지 않고 은혜라고 합니다. 9절과 10절입니다.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은혜라고 되어 있습니다. 12절과 13절에서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은혜로 되어 있습니다.
이진희 목사님의 [가나안에 거하다]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좀 더 보겠습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은혜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 우리 영혼에 참 기쁨과 평안과 만족을 가져다 주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은혜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은혜이지 축복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축복을 받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 잘 되고, 건강해지는 것, 형통하고 성공하고 부를 누리는 것, 꿈을 이루고 좋은 집에 사는 것, 은금이 증식이 되는 것, 소와 양이 번성하고 곳간을 새로이 짓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이렇게 축복에 관심이 있다 보니 바알에게 유혹을 당해 그를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은혜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지만, 축복은 하나님에게서 더 멀어지게 만들 수도 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믿음이 더 자라지만, 축복은 누리면 누릴수록 믿음에서 멀어지기 쉽다"
이 코로나의 시기,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은혜입니다. 축복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축복을 은혜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하나님과 더 멀어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축복은 결코 승리하는 삶이 되지 못합니다. 시편 73편 28절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축복보다는 먼저 은혜를 구하고, 축복이 주어지면 그것이 은혜임을 깨달아,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는 것이 승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