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130_설교정리_인생은 해석이다 (룻 1:11~14)
○ 말씀전문
[룻기 1장 11절~14절]
11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12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13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 설교요약
시각장애인이었던 강영우 박사는 천국에 가기 전에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라는 책을 남겼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어린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축구공에 눈을 맞아 두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1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지라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아들이 축구공에 맞아 앞을 못 보게 되었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는 충격을 받아 뇌졸중으로 쓰러져 8시간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누나는 장애인이 된 동생을 돌본다고 학교를 중퇴했습니다. 그리고 봉제공장에 다니다 과로로 2년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졸지에 그는 시각장애인이 된 채로 천애의 고아가 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죽음보다 더 못한 삶이 아닐까요? 강영우란 어린 시각장애인 학생에게 그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절망 뿐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누나가 죽기 전에 동생의 손을 꼭 붙잡고 이렇게 당부했씁니다. "불광동에 가면 천막을 친 교회가 있는데, 거기가면 누군가 병을 고치는 사람이 있다더라. 꼭 가서 기도를 받아." 그분이 바로 조용기 목사님입니다. 어린 강영우는 조용기 목사님께 기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육신의 눈을 뜬 것이 아니라 영의 눈을 뜬 것입니다. 꿈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한 꿈을 가졌습니다. "너는 비록 앞을 못보고, 고아이지만,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앞으로 너는 불쌍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꿈을 품고 믿음으로 나아갔더니 하나님께서 연세대학을 졸업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하셔서 3년 8개월 만에 피츠버그 대학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게 하셨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시각장애인 박사가 된 것입니다. 한국에 돌아올 길이 닫히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미국의 대학교수로 인도하셨습니다. 부시 대통령 때에는 백악관에서 장애인위원회 정책 차관보로 7년 넘게 미국의 장애인을 섬길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또 세계 장애인위원회 부회장 겸 루즈벨트 재단 고문으로 7억 명에 가까운 세계 장애인을 섬기는 귀한 인물로 사용해 주셨습니다. 2011년 성탄절을 이틀 앞두고 지인들에게 자신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는 것을 이메일을 통해 담담히 알렸습니다. "누구보다 행복하고 축복 받는 삶을 살아 온 제가 이렇게 주변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할 시간을 허락받아 감사합니다. 췌장암 말기로 의료진으로부터 한 달이라는 시한부를 선고 받았습니다. 귀하를 통해 내 인생이 더욱 빛났습니다." 또 자신의 장애를 생각해서인지 가장 먼저 장애인을 향한 유언을 영상으로 남기셨습니다. "장애를 저주로 생각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삶을 살면 그대로 돼요." "실명을 통해 하나님은 제가 상상할 수 없는 역사들을 이뤄내셨어요"라고 감사했습니다. 가족들에게 "슬퍼하지 마라. 하나님이 나를 이날까지 이렇게 잘 써주셨다"라는 위로를 남겼습니다. 강 박사님은 그의 마지막 책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에게 장애는 축복 그 자체였습니다. 저를 보면 어둠인데 주님을 보니 빛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만 보았습니다. 장애는 불편함일 수는 있어도 불완전함은 아닙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질병과 같은 것입니다. 당신을 지배하는 생각의 장애, 마음의 장애, 영적인 장애를 뛰어 넘어 나의 장애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꿈은 이뤄집니다. 하나님은 저의 실명을 통해 저의 삶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꾸셨습니다. 실명을 하기 전 저는 딱히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이 없었습니다. 원대한 꿈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 이 세상을 더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겠다는 생각같은 것은 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실명을 하고 나서야 저는 꿈을 가졌습니다. 그때서야 온전히 하나님의 도구로 살아가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목표가 생기니 공부할 이유도 생겼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희망으로 가득찬 삶을 살았습니다. 제 생애는 결코 고통의 시간들이 아니었으며,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축복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절망 중에서도 희망을 바라본 분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졸지에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두 며느리만 남은 나오미, 그리고 며느리들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가 섬기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을 섬기며 살겠다며 시어머니를 따르기로 택한 룻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도, 내가 직면한 문제보다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절망보다 희망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려면...
1. 멀리 가려면 함께 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인도의 성자 썬다 싱이 눈보라가 몰아치는 어느 날 네팔 지방의 산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방향이 같은 여행자가 있어 두 사람은 당장이라도 얼어버릴 듯한 추위 속에서 눈발을 헤치며 바삐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얼마나 갔을까, 인적이라고는 없는 산비탈에 이르렀을 때 눈 위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썬다 싱이 여행자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이 사람을 데리고 갑시다. 그냥 두면 분명히 죽을 것이오.” 그러나 여행자는 반대했습니다. “미쳤소? 나도 죽을지 살지 모르는 판국에 한가하게 누굴 도와준단 말이오?” 그는 오히려 화까지 내면서 서둘러 먼저 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썬다 싱은 할 수 없이 쓰러진 사람을 등에 업고 있는 힘을 다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눈보라는 갈수록 더 심해지고, 이젠 정말 걷기조차 힘들었습니다. 무거움을 참고 견디다 보니 온 몸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등에 업힌 사람의 얼었던 몸도 썬다 싱의 따뜻한 체온으로 점점 녹아 의식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마을 가까이 왔을 때, 그들은 얼어 죽은 시체 하나를 발견하곤 놀랐습니다. 그는 먼저 가버렸던 바로 그 여행자였던 것입니다. 혼자 가버렸던 여행자는 얼어 죽었고, 죽어가던 사람을 업고 간 썬다 싱은 서로의 체온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합니다.
흉년을 피해 모압으로 내려갔던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같이 남은 두 며느리에게 너희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고 원망할 수도 있었지만 나오미는 오히려 그들의 남은 인생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자기 소유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들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가서 새 사람을 만나 다시 시작하라고 했습니다. 혼자 살아가는 것이 두렵고 아득했겠지만 나오미는 자기만 생각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와 함께 하겠다고 했습니다. 룻 역시 자기만 생각하고 시어머니의 사정을 모른채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힘든 상황에 처할수록 나만 살려고 하면 다 힘들고 망하게 됩니다. 같이 가면 살 수 있습니다.
코로나 시기로 다들 어려운데도 한 가정에서 선듯 장학금을 기탁하신 분이 있습니다. 힘들지 않는 가정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는 그 가정이 얼어붙은 세상을 녹이는 따뜻함이 됩니다. 인디언 속담에 "빨리 가려면 혼자 가라. 하지만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설날을 맞이하여 고향을 찾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다들 힘들겠지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함께 이겨나가기를 다짐하는 아름다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습니다.
2. 인생을 해석하는 관점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나오미에게는 두 며느리를 배려하는 아름다운 마음도 있었지만, 인생의 고난을 해석하는 눈이 부족한 아쉬움도 있습니다. 12절과 13절입니다.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치셨다고 받아들였습니다. 20절과 21절에서도 비슷한 해석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그들이 모압으로 간 것은 흉년 때문이었습니다. 풍족한 상태에서 간 것이 아니라 궁핍해서 어쩔 수 없이 간 것이었습니다. 상황을 잘못 인식하고 원망의 눈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그리고 모압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은 것도 달리 생각하면 징벌이 아니라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은혜일 수도 있음을 바라보지 못한 것입니다. 내게 닥친 인생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고난이 더 큰 고난이 될 수도 있고, 반전의 인생을 시작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자신의 인생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본 대표적인 사람이 요셉입니다. 그는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 힘들게 살았으며,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혀 살아야 하는 억울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창세기 45장 5절에서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라며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해석했습니다. 이어 7절과 8절에서도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사람을 탓하기 전에 하나님의 섭리를 먼저 바라보는 눈을 가졌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인간적인 관점으로만 인생을 해석하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인생을 해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으로만 해석하려는 사람은 자신에 대한 자학, 남에 대한 원망과 불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을 인식하고 그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은 소망을 바라보며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이 다른 것이 아니라 눈이 다른 것입니다. 인생은 그것을 해석하는 눈에 따라 크게 달라지게 됩니다.
3. 선택의 순간, 주님이 나의 선택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다시 한번 친정으로 돌아갈 것을 강권했을 때, 오르바는 시어머니의 말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떠나 친정으로 갔습니다. 현실적인 면에서 판단하면 바람직하고 현명한 판단이었습니다. 누구든 오르바의 선택을 잘 했다고 평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와 함께 하겠다고 매달렸습니다.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택한 것입니다. 이 선택으로 인해 결국 그녀는 다윗을 후손으로 낳는 여인이 되고, 나중에 메시아의 혈통이 됩니다. 이방 여인인 룻이 하나님을 택한다는 것은 어쩌면 도박과도 같은 위기였을 것입니다. 그 위기의 순간에 그녀는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창세기 13장에 아브람과 롯이 갈라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각자의 집안이 커지자 서로 나뉘기로 하고 아브람이 조카 롯에게 먼저 원하는 땅을 선택하라고 합니다. 9절과 10절입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은 세상적 기준의 눈으로 바라보고 선택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달랐습니다. 언듯 보면 롯이 택하지 않은 곳을 자연스럽게 택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행간의 뜻을 깊이 생각하면, 아브람이 택한 것은 좌나 우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맡긴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자녀를 어떤 대학에 보낼 것인가도 택해야 합니다. 어떤 교회에 나갈 것인가도 택해야 합니다. 어떤 직장을 구할 것인지, 어떤 사업을 할 것인지도 택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오직 세상의 눈으로 바라보고 세상적 기준으로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2022년에는 우리의 선택이 하나님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길게 가는 길입니다. 바르게 가는 길입니다. 그 길로 가기를 결단하며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