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211107_설교정리_삭개오, 예수님과 만나다 (눅 19:1~10)

서정원 (JELOME) 2021. 11. 7. 20:08

○ 말씀전문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 설교요약

먼저 시인 정채봉의 [만남]을 소개합니다.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이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 오니까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이다

피어 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가장 비천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이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다 닿았을 때는 던져 버리니까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이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주니까

 

누군가는 또 얘기했습니다. 만남에는 크게 세 종류가 있다고.

첫째는 좋은 사람과의 만남이요

둘째는 좋은 책과의 만남이며

셋째는 진리이신 예수님과의 만납입니다.

지금의 나는 부모님, 친구, 동료, 이웃, 스승과의 만남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도끼처럼 나를 쪼갠 책들과의 만남의 산물입니다.

이 만남들도 좋은 만남이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영원을 사모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과 좋은 책을 만나도 영원의 문제, 죄 용서의 문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오늘 성경 속에서 이 예수님과의 대표적인 만남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삭개오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삭개오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오늘 삭개오의 예수 만남을 통해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은...

 

1. 인생의 갈증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과 2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삭개오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디서 만나게 되는지를 먼저 보여줍니다. 그는 당시 허가된 도둑놈이라고도 불렸던 세리였으며 더구나 세리장이었습니다. 그 세리장 직을 통해 많은 돈을 모았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님을 만난 곳은 여리고였습니다. 여리고는 왕족들의 휴양지가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며 풍족한 도시라서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그런 도회지였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로 오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며 모여들었지만, 사람들로부터 비난받고 손가락질 받던 삭개오는 다른 사람들처럼 떳떳하게 나서서 예수님을 바라볼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그도 예수님을 보고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변에 있던 돌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당시 여리고와 같은 중동지역에는 종려나무가 많았습니다. 종려나무가 중요하게 여겨지던 시대였습니다. 반면에 돌무화과 나무는 어려운 목자들이 열매를 채취하기 위해 오르던, 관심받지 못하던 나무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종려나무가 아닌 돌무화과 나무에 오른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숨고 싶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럼 이렇게 숨어서라도 예수님을 보려고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많은 돈을 축재한 그에게도 무언가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 속에서도 꿋꿋하게 돈을 모아 부자가 된 그이지만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갈증은 비단 삭개오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돈이 많든,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이든, 늘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우리들 누구에게도 있습니다. 전도서 1장 7절입니다.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아무 부족함도 없이 살았던 솔로몬도 이렇게 갈증을 느꼈습니다. 

이 인생의 갈증을 해결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삭개오가 돌무화과 나무로 올랐습니다. 우리도 삶 속에서 가지고 있는 갈증이 있음을 공감한다면 삭개오처럼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2. 존재를 인정받는 결정적인 만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3절입니다.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이". 그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세리였을 뿐만 아니라, 외모도 키가 작은 볼 품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심적으로도 위축되어 살았던 사람이고 육체적으로도 자신감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예수님이 쳐다보셨습니다. 수많은 군중 속에서도 예수님의 눈길이 돌무화과 나무 위에 숨은 듯이 올라있는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그리고는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서 유하여야 하겠다"(5절) 라고 하셨습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의 뜻은 '의로운 사람', 혹은 '성결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 취급도 하지 않던 그에게 예수님이 다들 들으라는 듯이 "의로운 사람, 성결한 사람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삭개오가 세리장 삭개오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8장 11절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그리고 13절입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사람들의 냉대 속에서 돈이라도 모으지 않으면 정말 어느 것으로도 사람 대접도 받지 못할 것 같은 마음에 지독하게 열심히 살았던 그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돈도 모든 것을 채워주지 못하고 여전히 내면에 또 다른 갈증으로 시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존재 자체로 가치가 있다. 그래서 내가 너를 찾아 이곳에 왔다' 라고 여겨주시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아, 예수님이 이 수많은 무리들 가운데서 나를 찾아오셨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는 순간, 그의 삶은 180도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6절입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어린 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즐거워하며 얼른 내려왔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돈과 명예가 만족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기쁨이었습니다. 

우리도 삭개오와 같은 반응을 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이 있었다는 것은 이미 내 가치를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너는 내게 네 존재 자체로 가치가 있다. 그래서 너를 찾아 이곳에 왔다' 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랜 기간 교회를 다녔던 사람도 예수님이 인정하는 내 가치를 재 확인하고 기쁨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하며, 오늘 블래싱 축제를 통해 처음 교회에 오신 분들도 이곳에 발을 딛고 들어서게 된 것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이 가치를 인정하셨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과의 새로운 만남을 이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3.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부르자, 여론은 좋지 않았습니다. 7절입니다.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하지만 그는 괘이치 않았습니다. 갖은 음식으로 정성을 다해 대접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집에서 유하다니 꿈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중대 발표를 합니다. 8절입니다. "삭개오가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았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소유로 사회에 공헌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가진 재산들이 예수님에 비해 가치 없는 것임을 깨닫고, 명예와 지위도 아무 의미가 없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삶의 가치는 예수님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삭개오의 삶의 가치가 달라졌습니다. 새로운 가치를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가치를 가지고 살아갈까요? 자식? 돈? 좋은 집? 지금까지 우리는 이런 것들에 가치를 두고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만족의 끝이 없습니다. 회의와 갈증만이 더욱 공고해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새로운 가치를 찾아야 합니다. 갈증을 영원히 해소해 줄 수 있는 가치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런 삭개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9절과 1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삭개오 그가 구원에 이르렀음과 하나님의 자녀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사람임을 선언하셨습니다. 세리로서 늘 피해의식 속에서 살았던 그, 사람들의 손락질 속에서 죄인처럼 살았던 그의 인생을 완전히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이 구원과 회복을 찾을 차례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삶의 최고의 순간을 살고 있어야 정상인데도 그러지 못하고 여전히 갈증 속에서 헤매고 있다고 여겨진다면, 삭개오처럼 용감하게 예수님 앞으로 나서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남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다시 발견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