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01_설교정리_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
○ 말씀전문
[베드로후서 1장 1~4절]
1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 설교요약
고대 유럽에서는 카타콤이라는 지하 무덤의 공동묘지들이 있었습니다. 로마에만도 120여개 있었습니다. 동굴을 파서 여러 개의 지하 무덤을 만들었기에 통로는 비좁기 그지 없었습니다. 한 사람이 지나가면 다른 사람은 근처 무덤 앞으로 피해주어야만 했습니다. 일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고 숨쉬기 조차 어려운 답답한 곳이었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무덤을 위해 만들어 둔 카타콤 속에서도 예배를 잃지 않고 신앙을 지켰습니다. 고통스런 삶이 단기간에 끝나지 않고, 대를 이어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지금 우리도 코로나라는 답답하고 힘든 시간 속에 놓여 있습니다. 사람들과 차단 된 채, 각자의 집 안에 갇혀 있듯한 일상이 끝이 보이지 않은 채 계속 되고 있습니다. 카타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환경이지만, 우리의 마음은 카타콤의 삶과 다름 없이 힘들게 느껴집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도 신앙을 잃지 않고 예배를 잃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 비법을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고난 속에서도 보배로운 믿음을 간직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좁디 좁은 지하 무덤 속에서, 횃불만 켜도 그 가스 때문에 호흡이 어려워서 캄캄한 채로 지내야만 했기에 그들은 시력 조차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믿음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보배로운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1절에서 가르쳐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 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 하노니". 우리도 이 보배로운 믿음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수에 가면 손양원 목사 기념관인 애양원이 있습니다. 그 안에는 손 목사님의 유품도 전시되어 있는데, 유품 중에 누른 봉투 하나가 있습니다. 목사님의 감사헌금 봉투입니다. 봉투 겉 면에 10,000원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당시 목사님의 한 달 사례비가 80원이었다고 하니 감사헌금으로서는 참으로 거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헌금보다 목사님의 더 보배로운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하고 양자로 삼았다는 사실입니다. 잠시 목사님의 10가지 감사 기도 중 일부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①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②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③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④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 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⑤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목회자가 아닌 성도의 보배로운 믿음도 있습니다. 영광에서 목회를 하시던 목사님을 한 초신자가 찾아와 상담을 했습니다. 자기 이웃에 한 고집스런 영감님이 살고 계신데, 하루는 자신의 돼지들이 그 영감님의 채소밭에 들어가 쑥대밭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돼지들 다섯 마리를 그 영감님이 잡아서 돌려주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참을 고민하던 목사님은 그 초신자에게 그 돼지들을 그냥 줘버리라고 했고, 그 초신자는 그 말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그 초신자가 환한 얼굴로 다시 찾아 왔습니다. 고집 센 영감의 황소 일곱 마리가 자신의 채소 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그 초신자에게, 그 황소들을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했습니다. 그 초신자는 이번에도 순종했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 그 고집 센 영감님이 이 초신자를 찾아와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으며, 자신이 가져간 돼지들을 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돼지는 다섯 마리가 아니라 새끼를 쳐서 90마리나 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후 그 마을에서는 '예수를 믿으려면 양씨처럼 믿어야 한다'고들 했답니다.
보배로운 믿음은, '예수님을 믿으려면 저 사람처럼 믿어야 한다. 예배를 드리려면 저 사람처럼 드려야 한다'는 신앙을 말합니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본이 되는 삶을 사는 사람, 코로나 시기에도 제대로 된 예배를 고수하는 사람, 그 삶과 신앙을 주님은 보시기를 원합니다. 어려운 시기를 다 함께 화이팅 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카타콤처럼 느껴지는 이 시기도 승리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2. 보배로운 믿음을 위한 산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로마의 박해를 피해 뿔뿔이 흩어져 디아스포라로 살아가야만 했던 초대 교회 성도들은 무엇을 바라보고 살았을까? 그것을 4절에서는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라고 합니다. 그 지극히 큰 약속이 무엇인지를 베드로전서 1장 3절과 4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큰 약속이 산 소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생과 천국 소망이 산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쓰신 '끈 떨어지 연'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실패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큰 물주'이다. 살다 보면 나에게 큰 힘이 되어줄 만한 사람들이 보인다. 권력있는 사람, 똑똑한 사람,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그 끈을 잘 붙잡으면 성공하리라 생각하고 그를 따라다니는 경우가 참 많다. 미국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돌아온 한 전도사가 마땅히 섬길 곳을 찾지 못하고 '끈 떨어진 것 같아요. 제 마음이'라고 했을 때, '네가 끊어졌다는 끈은 끈이 아니야. 그건 끊어진 게 아니라 본래 끈이 아니었어. 끈은 하나 밖에 없어. 그 끈을 붙잡아야 살아. 그 끈은 보이지 않지만, 붙잡으면 끊어지지 않지'. 내가 얘기했던 끈은 하나님이었다. 우리는 하나님만 끈으로 삼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사실은 썩은 동아줄인데 하나님보다 더 든든해 보인다고 그걸 끈으로 여기는 경우가 참 많다. 사람을 의지하고,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면 실패하고 멸망하게 된다."
사람의 끈, 세상의 끈은 언제든 끊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끈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끈을 붙잡는 데는 조건이 있습니다. 세상적인 끈을 내려놓아야만 붙들 수 있습니다. 시편 121편 1절과 2절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코로나로 인해 앞이 보이지 않는 이 갑갑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끈으로 하는 산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이 산 소망이 살아있을 때 우리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3. 고난 속에 있는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카타콤 사람들이 지하 무덤 속에서도 견디고 살아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목적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 본문 4절부터 7절을 통해 그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떄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보배로운 믿음, 그 보배로운 믿음을 위한 산 소망에 더해 덕과 지식을 가지라고 합니다. 물론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덕'입니다. 덕은 덕스럽다에서 온 말입니다. 컵이 물을 받아 쓰임을 받을 때, 원래 의도되었던 용도에 맞게 잘 쓰일 때 '덕스럽다'라고 합니다. 인간이 원래 하나님이 만드신 목적대로 잘 쓰이고 있으면 하나님이 '덕스럽다'고 하십니다. 여기서의 덕은 그런 덕을 의미합니다.
카타콤 속에서 초대 교인들이 지하 무덤을 견뎌낼 수 있었던 힘은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하시고자 하는 목적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시기 속에 있는 우리도, 이 힘들고 답답한 상황을 견디고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목적이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럴 때 고난은 고통이 아니라 연단이 됩니다. 그 목적을 알고 순종하여, 이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