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328_설교정리_십자가! 나를 향한 주님의 기대
○ 말씀전문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설교요약
내일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고난주간만 되면 윤동주의 [십자가] 시가 생각납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 높은데도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운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괴로운 사나이, 행복한 예수라는 고백이 마음을 울립니다. 머리에 가시관이 씌워지고, 손과 발에는 못이 박혀 육체적으로는 괴롭기 그지 없었지만, 우리를 향한 그 마음만은 행복했다는 그 표현이 우리에게 울림을 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어떤 십자가인지를 잘 보여주는 싯귀입니다. 고난 주간을 맞이하는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바라보고 새겨야 할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가 고백해야 할 삶의 모습은...
1. 나의 죄를 깨닫게 하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구약에서의 제사를 이해해야합니다. 제사에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할 양이 필요했고, 양을 죽이기 전에 우리의 죄를 그에게 전가시킬 안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양을 죽여서 제사를 지내면 우리의 죄가 사해진다는 의미였습니다.
이와 동일한 개념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요약하면, ①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 ②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으셨다. ③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되셨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증거하고 잘 표현해 주는 말씀이 오늘 말씀의 5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오늘 말씀의 세 절에만 해도 '우리'라는 표현이 아홉 번이나 나옵니다. 2,000년 전에 이사야가 부른 그 '우리'와 지금의 '우리'는 다른 '우리', 상관없는 '우리'가 아니냐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17세기에 활동한 화가 램블란트의 '세 개의 십자가' 그림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램블란트의 그림들을 보면 그의 영적 인사이트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곁에는 두 강도 뿐만 아니라, 병사들, 제자들, 그리고 가족들이 있습니다. 그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 속에는 낮선 남자 하나가 그려져 있음이 백미입니다. 그것은 바로 랩블란트 자신입니다. 비록 17세기에 살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에 자신도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핵심은 빌라도, 가야바와 안나스를 포함한 제사장들, 그리고 가룟 유다입니다. 빌라도는 예수에게 죄가 없음을 알고도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위해 진리를 외면한 자입니다. 제사장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사수하기 위해 시기심과 질투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는 돈에 대한 욕심으로 예수님을 죽게 한 자입니다. 이들이 가지고 있던 진리의 외면, 시기와 질투심, 돈에 대한 욕심이 지금 우리에게도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다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재현된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을 죽일 자들입니다. 램블란트는 그것을 깨닫고 십자가 그림 속에 자신을 그려 넣었던 것입니다. 램블란트가 했던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를 볼 때마다, 2,000년 전에 있었던 십자가 사건이 아니라, 지금 나의 죄를 깨닫는 이 현장의 십자가가 되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는 십자가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죽을 수 없습니다. 6절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대신 죽게 하셨고, 예수님도 흔케히 그 죽음을 담당하셨습니다. 사랑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가시면서도 이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죽어가는 그곳에는 예수님의 어머니도 보고 계셨고, 제자들도 보고 있었으며, 공생애 동안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아셨기에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과 하직 인사를 해도 모자랄 시간이었음에도 누가복음 23장 39절부터 43절에는 곁에 달린 행악자들과 말씀을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시각으로 보면 시간 낭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이 행악자들 까지도 사랑하시면서 죽어가신 예수님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아무 것도 아닌 나 이지만, 내가 기도하고 부를 때 나를 위해 가던 길을 멈추시고 십자가 은혜를 베풀지 않겠습니까. 그 사랑의 은혜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음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연세가 80을 넘은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오랜 신앙 생활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활달하게 웃는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권사님의 얼굴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권사님은 결혼하고 얼마되지 않아 권사님의 남편이 전장으로 불려갔다고 합니다. 먹고 살기가 빈궁하여 아이를 낳을 즈음에 아이를 낳으려 친정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친정 역시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 그녀를 반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입이 하나 더 늘었다고 눈치를 주었습니다. 눈칫밥을 먹으면서 해산을 했는데 아이는 쌍둥이였습니다. 권사님은 한 아이에게만 젖을 주고 한 아이에게는 젖을 주지 않았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한 아이를 굶겨 죽인 것입니다. 이 일이 평생 권사님의 마음에 박혀 "자식 죽인 엄마"라는 아픔으로 남아 있어서, 평생 웃지 못하고 살아오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부흥회 말씀에 감동을 받고, 그 목사님을 찾아가 이 일을 고백했습니다. 목사님은 이 권사님이 복음으로 살아가지만 복음의 기쁨으로 살아가지 못함이 너무나 가슴아팠습니다. 그리고는 권사님을 교회 십자가 앞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권사님, 이 십자가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미 권사님을 용서하셨습니다. 자신의 죄에 갖혀 주저앉아 계시지 마시고 예수님을 따라가십시오". 그제서야 권사님은 입술로 고백하고 진짜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환한 웃음을 되찾았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아픔과 슬픔을 주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인생에 행복이 되는 십자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 은혜가 그 십자가에 있습니다.
3. 예수님의 기대를 깨닫게 하는 십자가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할 때 거기에는 부모의 자식에 대한 기대도 함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 죽음을 지신 배경에도 우리에 대한 기대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의 죽음이 헛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이루고자 하는 성취도 있지만 또한 기대도 있습니다. 이 기대를 알 때 우리의 삶에 변화가 찾아옵니다.
블로그에 올라온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둔 어떤 엄마 이야기입니다. 엄마의 손등은 심한 화상으로 흉한 흉터가 선명하게 나 있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은 엄마의 흉터가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을 불러서 생일 잔치를 하게 되었을 때, 엄마에게 음식을 가지고 나올 때는 꼭 장갑을 끼고 가지고 오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하지만 바쁘게 일하던 엄마는 깜빡하고 그대로 나왔습니다. 아이들이 돌아간 후 그 딸은 엄마에게 창피해 죽겠다며 원망을 퍼부었습니다. 그 딸이 커서 왜 엄마의 손에 흉터가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흉터는 화재가 났을 때 자신을 살리기 위해 불 속에서도 안고 뛰어 나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딸의 마음은 찟어지는 듯 했습니다. 엄마는 자식들이 건강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을 희생합니다. 그 희생에는 기대가 있습니다.
지금도 거룩한 곳, 경건한 곳에 서게 되면 영적 질문을 하곤 합니다. 성지순례를 하는 중에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을 오른 비아돌로로사에서 했던 질문과 하나님의 음성이 고난주간을 앞두고 생각이 났습니다.
첫번째 질문은 "예수님,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이 채찍에 맞아도, 이 십자가를 져도 좋을 만큼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란다"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처럼 크고 단단합니다.
두번째로 "주님께서는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너 만은 나를 위해 살아주면 안되겠니?" 라는 것이었습니다. 네 남은 인생을 이제 너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위해 살아주면 안 되겠니 하는 이 말씀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고 계신 기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인 사랑과,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고 있는 하나님을 위한 삶, 그것을 깨닫는 자에게 만이 이후 가야 할 길이 선명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 길을 보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