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319_금요예배_그 습관을 멈춰주세요 (지현일 전도사)
○ 말씀전문
[마가복음 2장 18~22절]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 설교요약
살아가면서 습관은 아주 중요합니다. 좋은 습관은 성공을 이루게 하고, 나쁜 습관은 실패의 길로 몰고 간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일반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얘기하는 좋은 습관도 그 본질을 들여다 보면 나쁜 습관이 되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나쁜 습관은 버려야 하겠지만, 좋은 습관처럼 보이지만 그 본질이 나쁘게 되어 있는 습관도 과감히 멈추어야 합니다.
신앙 생활에서도 조흔 습관이 있습니다. 새벽 일찍 일어나 묵상의 시간을 갖는다든지, 주일 예배를 빼어 먹으면 안되다는 생각으로 반드시 참석하는 습관, 매일 아침 새벽기도에 열심히 참여하는 습관, 매일 같이 영성일기를 쓰는 습관 같은 것은 신앙 생활에서 분명 좋은 습관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이 좋은 습관도 그 본질을 벗어나 형식적인 모양에 그치고 있다면 우리는 과감히 그 습관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럼 우리가 영적으로 좋은 습관을 만들고 유지하려면...
1. 익숙한 종교생활은 멈춰야 합니다.
금식은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하는 금식은 형식으로 보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본질을 벗어나면 곤란합니다. 금식은 본질은 그 속에 하나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금식은 자기 과시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을 정죄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 금식 속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틀어 앉아 있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금식은 습관화 되어야 하는 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종교적인 습관, 자기 과시를 위한 수단이 되는 습관이 되면 멈춰야 합니다. 매주 드리는 예배나 찬양,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어떤지 늘 되돌아 봐야 합니다. 그 믿음 생활이 하나님께 중심을 둔 행위인지 살펴보고, 본질을 놓치지 않고 붙들고 나아가는 믿음 생활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2. 믿음의 행동의 동기를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금식의 동기가 무엇인지 레위기를 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레위기 23장 29절과 30절입니다. "29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30 이 날에 누구든지 어떤 일이라도 하는 자는 내가 그의 백성 중에서 멸절시키리니". 이는 대속죄일에 대해 하신 말씀입니다. 속죄를 받으면 좋은 일입니다. 기뻐해야 마땅한 날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스스로 괴롭게 하라 (금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제물의 희생과 죄사함의 은혜를 되새기라는 뜻이 담긴 것입니다. 이 동기를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열심이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열심이었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동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 동기를 알지 못한 그들의 잘못된 습관을 눅가복음 11장 42절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42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빠진 열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신앙생활도 점검해 봐야 합니다. 주일예배도 열심히 참여하고, 매일 아침 말씀도 묵상하는 자신이 스스로 성실하게 신앙생활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겉모습에 현혹되어 그 신앙 활동들의 동기를 점검해 보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에게도 속임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예배, 묵상, 기도, 헌금, 사역...늘 그 참된 동기를 생각하고 점검하며 신앙생활을 해야만 나쁜 습관에 빠져있지 않게 됩니다.
3. 은혜를 담기 위한 새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19절과 20절을 보겠습니다.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라 축제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같이 계시는 이 시기에는 금식을 할 때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도 과거부터 아무 생각없이 정해진 날짜에 무심코 하던 그 금식한다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종교적 전통에 빠져서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고 안타까워 하십니다. 그것을 생 베 조각과 새 포도주 부대로 비유하셨습니다.
헌 포도주 부대는 그 속에 담긴 포도주가 발효하여 늘어날 대로 늘어나 있는데, 새 포도주를 거기에 담으면, 새 포도주가 발표하여 더 늘어나면 그 부대는 터져 버립니다. 헌 포도주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 종교입니다. 그리고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새 포도주 부대에 담아야만 합니다.
헌 포도주 부대는 바리새인들처럼 고정관념, 옛 습관에 고착되어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새 포도주 부대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말씀을 담을 수 있는 거듭난 사람들을 뜻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그 말씀을 새 포도주 부대에 담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처음 들었을 때의 달콤함, 그 첫사랑을 느낄 수 있는 포도주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우리는 곧 다시 바리새인들 처럼 옛 습관에 안주하는 신앙인이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럴려면 매 예배, 매 기도, 매 찬양, 매 헌금, 매 사역 속에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모함으로 '오늘' 부어주시는 은혜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