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28_설교정리_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 1 (롬6:3~8)
○ 말씀전문
[로마서 6장 3절~8절]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 설교요약
① 십자가로 인해 속죄에 확신이 있습니까?
② 순교할지라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③ 예수님께서 내 마음에 임하셨음을 아십니까?
④ 내 양은 내 음성을듣는다고 했는데,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까?
⑤ 예수님을 믿으니 두려움과 염려가 다 사라졌습니까?
⑥ 예수님이 목자가 되셨으니 이제 부족한 것이 없습니까?
⑦ 은밀한 죄가 다 사라졌습니까?
⑧ 오늘 죽어 천국에 간다 해도 기쁘시겠습니까?
⑨ 원수도 사랑하게 되었습니까?
⑩ 자아가 죽었습니까?
유기성 목사님이 설교 중에 성도들에게, 몇 개나 아멘으로 답할 수 있는가 시험해 보라고 하셨던 질문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 이라면 모두 '아멘'이라고 답할 수 있어야 하지만,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십자가 은혜'에 대한 말씀입니다. 진정한 복음은 십자가이며, 삶의 모습도 그 십자가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말씀이 보여주는 그 십자가 은혜로 살아가려면...
1. 예수님과 함께 '내가' 죽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반만 맞는 말입니다. 여기에 '예수님과 함께 내가 그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라고 덧붙여야만 완벽한 복음이 됩니다.
본문 4절에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라고 분명히 써 있습니다. '그와 함께 장사 되었다' burried with him.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6절에서,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라며, 구체적으로 우리의 옛 자아가 함께 죽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내 자아'를 죽일 수가 없습니다. 후회되는 큰 잘못을 저지르면 '내가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지' 라곤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스스로 다짐해도 내가 가지고 있던 그 자아와 욕망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가 언젠가는 다시 얼굴을 들고 나타나곤 함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만약 내 자아를 내가 죽일 수 있다면, 하나님이 굳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내 자아를 죽이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을 때, 내 자아도 함께 달려 죽었다' 라는 것을 믿음으로 선포할 때 가능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이라는 사람이 인간으로서 나보다 뛰어난 사람, 완벽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나와의 차이는, 바울이 예수님과 같이 죽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자기 자아가 죽었음을 믿는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아를 죽이는 방법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자기 자아가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어떤 사람의 오해로 인해 정말 힘든 시기가 있었습니다. 결국은 독설로 가득찬 한 페이지 가득한 메시지도 받았습니다. 매일 매일 화도 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만나서 따지고도 싶었고, 어디 가서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정말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기도 중에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따지지 말라". 나는 그때부터 이를 악물고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놀랍게도 내 마음의 분노가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나는 이 십자가 고백에 복음의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신앙의 가장 큰 문제는 여기, '죽지 않는 내 자아'에 있습니다. 이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입술을 깨물고 '내 자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달려 죽었다' 라는 고백을 해야만 극복됩니다. 그 고백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2.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내가' 다시 살았음을 믿어야 합니다.
4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침례의 의미를 다시 상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침례는 물 속으로 잠기기도 하지만 물 밖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잠기는 것은 내 자아가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나오는 것은 부활 즉, 다시 살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8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내 자아가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아내를 자녀를 직장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만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어릴 때부터 고모의 손에서 자란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사사건건 고모와 부딪혔습니다. 힘들게 키웠는데도 자기 말을 잘 듣지 않는다며 고모는 고모대로 잔소리가 늘어갔고, 소녀는 그 잔소리에 인해 더욱 엇나가게 되었습니다. 답답했던 그 소녀는 친구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회개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회개하고도 대문을 열고 들어가 고모를 보면 또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와 같은 회개와 기도가 반복되면서 성령이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녀의 고백입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 "내가 고모를 만나면 안 되는 거야.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는데, 예수님이 고모를 만나주시면 좋겠다" 라고 입술로 고백했습니다.
귀가하여 대문 앞에서 다시 한번 기도를 하고 대문을 열고 들어섰습니다. 고모가 "너 또 교회 갔다 온거지. 하지말라는 것은 골라가며 하네" 라면서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따라 그 소녀에게는 그 고모의 잔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고모의 늙어버린 주름살과 흰머리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고모, 왜 이리 늙어버린거야. 내가 속을 썩여서 미안해" 라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러자 고모도 소녀를 부둥켜 안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그 소녀 안에 있던 예수님이 고모를 만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로 사는 삶의 모습입니다.
내가 내 아내, 내 남편을 만나면 부딪히게 될 때가 많습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이 만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내가 다시 살았음을 믿고, 내 안에 있는 주님이, 내 가족, 내 직장 동료들을 만나기를 축원합니다.
3.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11절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서 '여길지어다' 라는 말은 '로기제스데'인데, '간주하다. 결론을 내리다. 결정하다' 라는 의미이며, '그렇게 여기고 살아간다'라는 현재형 표현입니다. 삶이 현재형이 되려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났다는 과거형만 믿는 것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인도 부흥을 이끈 존 하이드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수로 와 달라는 초빙을 뿌리치고, 인도 선교를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신학교를 졸업해 혈기왕성하던 하이드 마음에는 슬그머니 교만이 들어찼습니다. 위대한 선배 선교사들을 닮으려는 열정이 가득한 반면 자부심도 대단했습니다. 이는 교수직 초빙을 거절하고 인도 선교사로 자원했다는 자랑스러움 때문이었습니다. 선교할 열정 또한 주님을 향한 사랑과 충성이라기보다 자신의 야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이드가 이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하이드가 배에 오르자 아버지의 친구였던 목사가 보낸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편지에는 “사랑하는 존, 네가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까지 너를 두고 기도를 멈추지 않을 거야!”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하이드는 화가 났습니다. 지금은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인도 선교사로 새 삶을 시작하는 자신을 조롱하는 듯했습니다. 하이드의 내면에서는 맹렬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하이드는 괴로워했지만, 한편으로는 ‘편지 내용이 옳고, 내가 성령 충만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이드는 기도했습니다. ‘성령으로 채워 달라’는 기도를 시작하자 자신이 보였습니다. 하이드가 그동안 품어온 마음이 이기적인 야망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하이드의 영적 몸부림은 향해가 끝날 무렵까지 계속됐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꾸는 것이다. 성령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와 계신 성령님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하이드는 깨달았다.
그리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인도에서 보게 될 언어 시험에서 낙방하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봉사하는 무명의 선교사가 되어도 좋으니, 다만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 주십시오". 그의 고백은 '내가 아직 죽지 않았구나. 죽은 사람은 반응하지 않는다' 라는 것을 깨달은 자의 고백이었습니다. 과거에 내가 어떤 자였는지도 중요하지만, 늘 예수님으로 사는 지금이 더 중요합니다.
비대면 예배를 해야 되는 코로나 사태 앞에서, 지난 해 걱정이 커져 갔습니다. 동탄 지역의 아파트 가격이나 전세가격이 폭등하면서 평택이나 인근 지역으로 이사를 가는 사람들도 늘어갔습니다. 비전으로 벌여 놓은 교회 건물 신축의 건도 자꾸만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걱정하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하려 하면 할 수록 걱정은 더욱 또렷하게 나를 엄습했습니다. 그때 내가 입술을 깨물고 고백을 했던 영성일기입니다. "주님, 인간 박춘광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주님, 목사 박춘광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그때 들었던 주님의 음성이 지금도 또렷이 생각납니다. "박목사야, 너는 이제부터 다시 나를 주목해라. 그리고 내가 사랑한 너에게 맡긴 영혼을 사랑해라. 네가 할 일은 코로나의 걱정과 염려가 아니다. 네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네가 있는 그 자리에서 나를 사랑하는 일이고, 내가 사랑한 영혼들을 사랑하는 일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선택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입니다. 그 삶을 살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