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14_설교정리_내가 아무 쓸모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
○ 말씀전문
[요한복음 9장 1절~7절)
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 설교요약
군 내에서도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군복무를 했던 시절에는, 입대 전부터 교회에 다니다가 입대를 해서 정말로 예배를 사모하여, 주일에 군내의 예배당을 찾은 사람도 있지만, 그 시간 만이라도 편한 시간을 갖기 위해 도망가듯 예배드리러 가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렇든 저렇든 그 예배를 통해 수많은 병사들이 하나님을 접하게 됩니다.
논산 훈련소에는 연무대 교회가 있습니다. 주일이 되면 수 많은 병사들이 예배를 드리려고 이곳으로 몰려드는데, 이곳 예배 시간에 부르는 찬양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소위 논산 훈련소 실로암입니다.
그들이 흥분하며 온 힘으로 이 찬양을 부르는 것은, 자유가 제한 당한 그곳에서, 마음껏 찬양하고 예배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치고 힘든 훈련 생활을 잊어버리고 힘차게 일어서서 춤추고 노래하며 다시 내일의 훈련을 위해 재충전하는 장병들의 모습이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오늘 말씀은 요한 복음에서의 여섯 번째 기적인 실로암의 기적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지치고 무기력해져 있는 지금 이 시기에 다시 힘차게 일어서서 맘껏 찬양하고 맘껏 예배할 수 있는 실로암의 은혜를 경험하려면...
1. 내 인생을 향한 그 분의 시선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분리수거일이 되면 아파트 마다 버리는 물건들로 가득합니다. 지자체마다 쓰레기 처리 문제가 심각합니다. 쓰레기는 말 그대로 아무 쓸모가 없이 버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쓰레기를 이용해서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재 탄생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본 작품입니다. 버려진 폐품을 이용해서 만든 예술품입니다. 이처럼 폐품도 누구의 손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쓰레기도 되고 아름다운 예술품도 됩니다.
아무런 쓸모 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하며 자학하는 사람도, 그 인생이 폐품 같이 여겨지는 사람도, 그 인생에 예수님의 시선이 머물게 되면 아름다운 인생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늘 우리에게 시선을 두고 계십니다. 1절입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보신지라'는 '에이덴'이라고 하는데 '능동적인 동작의 시작' 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말해서 능동적으로 살펴보고 계신다 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9장 1절을 해석해 놓은 것을 보면, "그는 길을 가신다. 그러나 이런 부지런한 몸동작만큼이나 부지런히 눈을 돌려 주위를 살피신다. 문제가 있는 사람, 병든 사람을 찾으신다. 그러므로 어떤 곤경에 처한 사람이든 쉽게 절망하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 분의 부지런한 몸동작과 시선이 이내 나와 내 문제를 포착하실 때까지 우리는 인내로써 기다려야 한다"
시선이 내게 머물 때, 그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바라보시고 Toutch 해 주실 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기다려야 합니다. 비록 부모까지도 나를 포기했을 지라도, 친구들이 포기했을 지라도, 우리는 주께서 나를 보고계시고 있다는 것을 믿고 기다리면, 우리가 미처 상상할 수도 없었던 걸작 인생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는 자신이 마치 폐품 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죄인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처럼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쓸모없이 되었다고 느끼게 될 때 죄인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명절이 되었는데도 부모님께 변변히 용돈도 드리지 못한다고 느끼게 될 때도 그렇습니다. 회사에서 능력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고 느낄 때도 그렇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라고 말씀하셨는데, 메세지 성경에서는 이를 "하나님은 우리가 그 분께 아무 쓸모가 없다고 여겼을 때", no use whatever to him.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내 인생이 폐품 같은 인생, 쓸모없는 성도라고 느껴지더라도, 주님께 촛점을 맞추고, 주님이 바라보고 계심을 깨닫고, 주의 손길을 기다리는 삶을 살 때 우리는 실로암의 은혜를 다시 경험할 수 있습니다.
2. 세상의 소리가 아닌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묻습니다. 2절입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아이가 장애인으로 태어나든지, 아이가 아프면 부모는 그것이 마치 자기 잘못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자식들이 취업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거나, 자식들의 가정에 무슨 문제가 일어나면, 그것이 마치 자기 죄처럼 여겨집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맹인 된 자를 앞에 두고 제자들이 그것이 저 자 때문인지, 부모 때문이냐고 묻습니다. 그 맹인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쓰라린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처가 되고 주저앉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조차도 맹인에게 스스럼 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남을 향해 이런 말들을 쉽게 하고, 우리 스스로가 이런 말을 듣게 되면, 자책하고 주저앉게 됩니다.
이 제자들의 물음 앞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3절입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소리에 민감합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우리면 됩니다. 사람들은 모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하심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모르는 자의 소리에 상처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2절이 아니라 3절의 소리에 귀를 여는 자가 되어야만 다시 살아나는 은혜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3.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실 일을 기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독특한 치유의 장면을 보여줍니다. 6절과 7절입니다.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이전까지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대부분 말씀으로 이루어졌었습니다. 간혹 Toutch 하시는 정도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침을 밷어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Toutch를 통한 영혼의 회복을 의미하십니다.
'바르시고'는 ['에피' (Upon) 위에 + '크리오' Anoint 기름을 붓는다] 라는 것을 뜻하는데, 여기서의 '크리오' 에서 파생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시 말해 '상처 위에 그리스도가 계시다' 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아픔은 예수님이 만져주실 때 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굳이 실로암으로 가서 씻어라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적으로 새롭게 바라보라'는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대감을 가지고 영적인 실로암을 다시 한번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은 우리가 인생을 폐품처럼 여기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특별히 이루실 것이 있으시기 때문임을 알고, 그 영적 실로암을 바라보고 다시 일어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실로암의 은혜를 경험하려면, 오늘도 주님의 시선이 내게 주어지고 있고, 내가 기대감을 갖고 주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먹지도, 걷지도, 아무 것도 쓰지도 못하는 송명희 시인의 '나'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오늘 말씀에 대한 간증일 듯합니다.
"나"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