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201206_설교정리_내 안에 야곱의 DNA (창 32:22~25)

서정원 (JELOME) 2020. 12. 6. 12:32

○ 말씀전문

22 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 말씀요약

김기현 목사님의 [내 안의 야곱의 DNA]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다윗보다 세속적이고, 삼손보다 거룩한 야곱, 영적인 듯 하면서도 육적인 사람, 순수한 듯 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야곱, 그렇게 이중적이어서 더 나와 닮은 야곱, 속이는 사람 야곱, 그런 그가 대표적인 성경 인물로 등장하고 창세기에서도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며 하나님께 복을 받고 그의 이름을 딴 민족이 세워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성경이라면 온통 예수님 같은 사람들만 나와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그런 야곱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가까이 누릴 수 있다. 우리 모두 야곱과 같은 사람이기에......, 극적인 반전이나 찬란한 성공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야곱이 고백한 대로 그의 삶은 험악한 세월로 얼룩져 있다. 고단하고 궂은 세월, 그러나 그 시간이 의미있는 이유는 그 삶에 분명하게 새겨진 하나님의 개입하심 때문이다. 야곱은 나고 나는 야곱이다"

자기 생각, 자기 뜻이라면 어떤 것이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던 야곱을 얍복 나루터에서 바꾸신 하나님, 내 생각대로 힘써 보지만 그럼에도 힘듦이 사라지지 않는 이 때에 그 야곱을 바꾸신 그 하나님이 내게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코로나로 인해 꼼짝달싹 할 수 없는 지금이 바로 하나님을 찾을 때가 아닐까요?

야곱을 변화시킨 그 변화가 내 인생에서도 가능하려면...

 

1. 홀로 있음의 시간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홀로 있는 시간을 어색해 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코로나 때문에 집에서 머물러 달라는 정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갑니다. 집에 있더라도 TV나 스마트폰이나 온라인 게임에 의지하여 홀로 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칩니다. 머리가 복잡하고 걱정이 많을수록 더욱 무엇인가를 붙잡고 있으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맞닥뜨려야만 할 일을 직시하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대면할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야곱도 그랬습니다. 장자권 사건으로 20년 간이나 형을 피해 외가집에 가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자신에게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두려움이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를 얍복 나루터로 인도합니다. 얍복 나루터는 "자신을 비운다, 자기 마음을 털어 놓는다" 라는 의미입니다. 마음에 가득한 걱정을 하나님께 내려놓고 비우라는 것입니다. 네 방법으로 가득찬 네 머리를 비워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마음을 토로하고 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 가득한 두려움과 걱정을 비우고, 내 자신을 대면하고 바라보는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가면을 쓰고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얼마나 남들이 기대하는 모습을 연출하는 삶을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속으로는 가슴앓이를 하면서도 남들 앞에서는 웃으며 연기를 했던 어느 개그맨의 죽음처럼 이제는 더 이상 가면을 쓴 삶을 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어느 50대 가장의 고백이 생각이 납니다. "목사님, 저는 50평생, 생존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단 한 번도 나 자신으로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늘 남과 비교하며, 때로는 가면을 쓰고, 남들의 시선, 평가. 인정, 여기에 목을 매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이 원하는 나는 있는데, 정작 내가 원하는 나는 없습니다. 목사님, 남과 비교하지 않으면서, 남이 원하는 내가 아닌, 내가 원하는 내 인생을 한번 살아보고 싶습니다"

야곱과 같은 DNA를 가진 우리가, 야곱과 같은 변화를 얻으려면, 하나님이 인도하신 그 얍복 나루터를 두려워하지 말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나를 비우고 나를 직시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모든 것을 하나님께 토로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은혜가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2. 자신의 한계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야곱의 인생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는 사람입니다. 장자권을 얻기 위해 형을 쏙이고, 마음에 드는 여인을 위해서라면 14년 간을 머슴처럼 살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자기가 마음 먹은 대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형 에서가 400명의 장졸들을 이끌고 자기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무려 550여 마리의 가축을 준비하여 뇌물로 구워 삶으려고까지 했습니다. 참으로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집요함을 보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한 방 먹입니다. 환도뼈, 즉 허벅지 관절을 꺾어 놓습니다. 그러자 그는 제대로 걸을 수 조차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는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가 아브라함이고, 아버지가 이삭입니다. 그런 집에서 태어난 그는 자신의 뜻대로 행하면서도 늘 마음 한 구석에는 언젠가는 하나님께로부터 된통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얍복 나루터에서 환도뼈가 꺾이고는 자신의 한계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내 일터에서 내 힘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내 가정은 내가 일으키고 지킬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그러나 코로나 앞에서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찝찝함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이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내 자신으로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깨달음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변화의 시작을 할 수 있게 됩니다.

 

3.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계를 알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얍복 나루터에서 환도뼈가 꺾인 야곱이 하나님의 발 뒷꿈치를 붙잡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붙잡자 하나님은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이름을 물라서 물었겠습니까? 알면서도 물은 것은, 야곱이란 "속이는 자, 빼앗는 자"라는 뜻이므로, 야곱에게 네 자신을 알라고 깨우쳐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친히 다스린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네가 이겼다"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은 분명 허벅지 관절이 어긋날 정도로 패배를 했는데도 하나님은 그에게 이겼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이 있습니다. 비록 허벅지가 꺾이도록 패배했지만 하나님에게 손을 들고 축복해 달라며 항복한 것이 바로 이긴 것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로 패했지만 절뚝거리며 새벽길을 걸어가는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만났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이겨 먹으려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두 손을 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두 손을 들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나 온 내 삶에 나도 모르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내 힘으로 될 수 없었던 수많은 하나님의 손길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는 나도 모르게 "아 맞다"라는 탄성이 터져 나올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내게 찾아와 나를 돌보셨던 그 하나님을 이제는 두 손 들고 항복하여 직접 만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야곱처럼 자연스럽게 변하게 될 것입니다.

 

[아 맞다] 박수진 작

하나님이 날 참 사랑하시네

하나님이 날 참 사랑하시네

세월에 묻혀 또 현실에 갇혀

잊고 살다가도 그냥 살다가도

어느 날 문득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날 참 사랑하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