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4_설교정리_ACTS29 (17)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이 되라 (행 9:1-6)
○ 말씀전문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 설교요약
추석 연휴에 스킷 맥나이트가 쓴 [성령께 나를 열다]를 읽었습니다. 성령을 알아가는 과정을 기록한 책입니다. 기회가 있을 때 한번 읽어 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부제 중에 있는 3개의 문장이 그 길을 함축적으로 잘 보여주기에 소개합니다. "God in Us, God with Us, God Transforming Us" 입니다. 직역하면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입니다. 이 코로나 시기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세 가지 들라면, 저는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과, 16장의 바울이 마게도니아 환상을 보고 아시아로부터 유럽으로 복음을 확산시키는 사건, 그리고 오늘 본문 9장에서 사울이 바울 되어지는 사건을 들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사울이 바울이 되어지는 사건을 통해, 그리고 스킷 맥나이트의 [성령께 나를 열다]의 권면을 통해, 우리도 어떠한 모습으로 신앙 생활을 해서 사도행전 29장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지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1.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의 삶은 열심과 열정의 인생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나기 후의 차이점은 그 방향성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 6절입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또 오늘 본문의 9장 1절과 2절입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열심과 열정의 대상은 오직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그의 삶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는 방향에 변화가 생깁니다. 속도는 그대로 인데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과 14절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핍박하던 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잡힌 그 일에 열정을 태우는 자로 바뀐 것입니다.
바울과 더불어 인생에 성공적인 방향 전환을 한 사람이 구약에도 있습니다. 야곱입니다. 그는 열심과 열정이라는 면에서는 세상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 할 사람입니다. 외가로 피신해 있던 그가 형 에서를 만나러 갈 때, 모든 가솔들을 앞서 건너 보내고 얍복 강가에서 천사를 만나 밤새 씨름을 합니다. 그때 그는 천사로부터 환도뼈가 부르지는 상처를 당하고는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방향을 내려놓게 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그에게 천사가 말합니다. 창세기 32장 27절과 28절입니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분명히 환도뼈가 부르지는 상처를 입고 패한 그에게 천사가 "네가 이겼다"라고 했습니다. 졌는데도 이겼다 함은 비록 육체적으로 졌지만 영적으로는 이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영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속이는 자, 빼앗는 자, 발뒷꿈치를 잡는 자"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더 이상 속이는 자, 빼앗는 자로 살지 말고 이스라엘, 즉 "이스라엘=하나님이 다스리신다"를 믿고 살아가는 삶을 살라고 합니다. 그런 승리의 삶을 살게 되어 이긴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야곱의 고집과 욕심이 내 속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얍복 나루터에 서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대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내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는 나루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무조건 앞으로 달려가는 자가 아니라, 제대로 방향을 잡고 달려가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눈에서 비늘 같은 것들이 벗겨져야 합니다.
사울의 눈이 멀어지자 아나니아가 와서 안수를 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사도행전 9장 17절과 18절입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비늘 같은 것은 레피스인데 영문 번역문을 보면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Something like scales".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비늘 같이 엉켜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공, 열심, 욕심, 권력욕 등 수 많은 것들로 덮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비늘이 떨어지자 그제서야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예수님이 보였던 것입니다. 복음이 보이고 십자가가 보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고집과 자아에 의한 비교의식, 열등의식 등의 비늘이 끼어 있습니다. 이것이 벗겨지지 않으면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이들이 벗겨지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18절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보다"는 "아나(보다)" + "블레포(보다)"를 의미합니다. 첫째는 눈으로 본다는 뜻이고, 두 번째는 위를 본다는 것입니다. 위를 본다는 것은 주님을 보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것만 바라보던 우리의 삶이 하늘을 보고,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꼭 붙잡고 있는 것을 내려 놓아, 내 눈에 덮힌 비늘을 벗겨내야 합니다. 내 욕심, 내 욕망, 내 미련, 내 아집, 내 고집을 내려놓고 우리가 꼭 보아야 할 예수님을 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사울이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자 가장 먼저 한 것은 바로 침례였습니다. 18절입니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침례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침례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것,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침례가 무엇인지 로마서 6장 3절과 4절이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나의 옛 삶이 십자가에서 죽어지고 예수님의 삶과 일치됨을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신앙의 핵심은 내가 십자가에서 죽어지고 예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를 잘 설명해 주는 예화가 있습니다. 어느 도시에 두 형제가 살았습니다. 일찍 부모를 잃는 형제는 서로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형은 예수님을 만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았고, 동생은 술과 여자로 방탕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동생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형을 찾아왔습니다. 그의 옷은 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형은 동생의 옷을 벗겨서 옷장에 넣었다가 곧장 다시 꺼내어 자신의 옷을 벗고 그 동생의 피묻은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곧이어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형은 붙잡혀 갔고, 살인자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사형 집행을 며칠 앞두고 형은 간수에게 편지 한통을 쓸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는 편지를 써서 간수에게 맡겼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사형되고 나면 그 편지를 자기 동생에게 꼭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사형이 집행된 후, 그 간수는 그 형이 그런 흉악한 일을 저지를 사람이 아닌데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부탁했던 편지 생각이 나서, 동생을 찾아갔습니다. 동생을 본 간수는 그 동생의 귀신 같은 흉칙한 모습을 보고는 편지를 전해 주고는 도망치듯 떠나 왔습니다. 열어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에게! 나는 네 죄의 옷을 입고 네 다신 죽노라" 자기 대신 형이 사형을 당한 것을 알고는 경찰서로 달려가서 울부짖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다시 한번 형이 남긴 편지를 펴 읽었습니다. 그런데 좀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두 번째 글귀가 눈에 띄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에게! 너는 나의 옷을 입고 나처럼 살아다오" 그는 울부짖었습니다. 그리고는 형의 옷을 입고 형이 살던 인생을 살았습니다. 형이 했던 대로 전심으로 예배하며 살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전에 술과 여자로 유혹했던 친구가 찾아와서 다시 즐기러 가자고 유혹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 옷의 주인을 그런 삶을 살지 않았다" 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리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삶은 그 동생의 옛 삶과 같이 돌아가서 사는 것이 아니라, 형이 살았던 삶으로 새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내 옛 과거의 모습으로 다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삶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새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