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6_설교정리_ACTS29 ⑪ 영적 시선의 부재를 두려워하라 (행5:1~6)
○ 말씀전문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 설교요약
고신대 신원화 교수님이 쓴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집트의 수도사 에바드 교수가 후배 수도사에게 삶의 지혜가 무엇인지를 가르친 내용입니다. 영적 장애물이 되는 단어들에 상징적인 별명을 붙인 내용인데 마음에 와 닿아서 소개합니다. ① 교만 (뭇 별 위의 보좌), ② 시기 (녹색 눈의 괴수), ③ 분노 (사탄의 화로), ④ 나태 (증오의 마귀), ⑤ 탐욕 (볼록 나온 올챙이 배), ⑥ 탐심 (꽉찬 배와 텅빈 영혼), ⑦ 정욕 (타는 갈증에 마시는 바닷물). 참으로 절묘한 표현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혼의 생수를 찾아가는데 방해물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우리가 영혼의 샘물을 찾아갈 때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의 말씀이 우리의 영적 인생에 소중한 레슨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 레슨은
1.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의 문제를 인식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보면서 사람마다 느낌이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어 마땅하다고도 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그래도 그렇지 조금 덜 냈다고 죽일 것까지야 있나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려고 할까요? 5장11절입니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모두가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왜 두려워했을까요? 첫째는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두려워했을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이것이라면 아마 초대교회는 문을 닫거나 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겪으면서 더 견고해지고 더 부흥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둘째로, 하나님 앞에서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의 소유를 팔아 일부를 숨기고 일부를 교회에 바쳤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에 욕심이 발동했기 때문이며, 하나님을 속이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것이 심각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과 교회라는 것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로 생각하면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회에 낸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행동은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께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이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는 사람들은 헌금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고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누구나 이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도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하면서 두려움에 떨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죄 중에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죄가 있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요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옛 번역에서는 업신여김을 받는다는 것을 만홀히여김을 받는다고 표현했습니다. 만홀히의 원어는 '뮈크테리조'인데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이 여김을 받는' 혹은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무서운 죄입니다. 이 말씀과 유사한 표현으로 되어 있는 책 제목이 생각납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 라는 책입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그때 하나님이 보고 있음을 기억하고 살아가는 삶,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면 어떤 두려운 일이 발생하는지를 확실히 인식하는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모든 행위가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일임을 깨닫고 살아가야 합니다.
2. 영적인 틈을 두려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처음부터 싹수가 노란 자들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들의 소유를 팔아 하나님께 바치려고 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작은 틈으로 인해 무너지게 되었다고 봅니다. 3절과 4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말씀 중에 반복되는 단어는 "마음"입니다. 마음에 욕심이라는 작은 틈이 생기고, 그 갈라진 틈을 헤집고 들어온 사단이 그의 온 마음을 점령해버려 무너진 것입니다.
개인의 욕심의 틈 뿐만 아니라, 그들 부부간에도 무너짐의 틈이 있었습니다. 2절입니다.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알더라는 히브리 원어로는 '쉬네아뒤에스' 인데, '은밀히 알다' 라는 의미입니다. 남편이 한 그 일을 아내도 은밀히 알았다는 것입니다. 내심 욕심이 있어 남편의 욕심에 동조를 한 것입니다. 배우자는 돕는 배필이라고 했습니다. 이 돕는다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돕는 지지자' 무조건 돕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돕는 거절자'입니다, 첫번째도 중요하지만 거절자로서의 배필 역할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조건 따른다는 것은 배우자를 돕는 것이 아니라 망치게 도와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해 주는 것이 올바른 배필입니다. 아나니아의 영적 틈을 매워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삽비라는 그 틈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사단이 쳐들어갈 수 있도록 틈을 더 벌려서 사단을 도와주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의 삶도 큰 구멍 때문에 인생이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는 경우는 더뭅니다. 잠깐의 방심이 코로나를 더욱 활개치게 만들어 온 나라, 온 세상을 어렵게 만듭니다. 작은 잘못된 생각이 삶을 무너뜨립니다. 순간적인 화가 가정을 불화로 이끌고 갑니다. 영적인 틈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한번 내 영적인 삶에 틈은 없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예배에 틈이 없는지, 경건생활에 틈이 없는지, 가정에서의 삶의 태도에 틈이 없는지, 사람들과의 관계에 틈은 없는지 살펴보고, 그 틈을 조기에 매워가기를 바랍니다.
3. 영적인 시선의 부재를 두려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무너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헌금을 하려고 한 것을 보면, 원래 믿음이 없어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시선을 놓쳤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놓치면 감추는 짓도 하게 됩니다. 욕심이 나는 물건을 훔치게 되는 경우도 아무도 보지 않는다는, 누가 보고 있다는 시선을 깨닫지 못할 때 발생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감추게 되면 그 감춘 것을 늘 마음에 두게 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그 감춘 것이 제대로 잘 있는지 늘 마음 속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시선이 하나님께 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감춘 것에 가 있습니다. 3절입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마음에 성령이 가득한 것이 아니라 사탄이 가득하다고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지 않고 돈을 묵상하고 재물을 묵상하다 보니 그 마음 전체를 사탄이 점령한 것입니다.
이를 본 초대교회 교인들은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강림을 직접 본 그들,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가 걸어가는 기적을 직접 목격한 그들은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아나니아가 탐욕에 빠지자 하나님도 성령도 안보이고 사탄의 하수인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도 언제든 저렇게 사탄의 하수인으로 떨어질 수 있겠구나 하는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에 대한 시선이 사라질 때 어떤 무서운 일이 초래되는지를 깨닫고 그 시선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얼마 전에 소개한 [시선]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라는 글귀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전에 내가 교회에서 어떤 자리에 있었든, 지금 하나님에게 시선을 놓지 않을 때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목사에게 가장 끔찍한 일은 기도하지 않고도 설교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끔찍한 일은 성령의 도움 없이 내 능력으로 사역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끔찍함을 탈피하는 방법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예정했던 영성일기 세미나가 연기되어 아쉽지만, 그 세미나 초반에 나오는 말씀을 소개합니다.
1) 나는 아침에 일어날 때 가장 먼저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2) 일을 할 때, 혼자 있을 때, 예수님을 생각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3) 예수님과 친밀함을 느껴 본 적이 있습니까?
4) 예수님이 내 기도를 듣고 계시고 나와 매일 함께 하심을 느끼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모두 YES라고 할 수 있어야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어느 선배 목사님의 권면]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들 질문들의 목사님이라는 단어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읽어보고 Question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1) 보이지 않으시는 예수님이 보이는 분처럼 바라보이시면 목사님을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2) 혼자 있을 때,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으면 목사님을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3) 교인들을 볼 때, 예수님이 함께 보이면 목사님을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4) 돈보다 예수님이 더 좋아 보이면 목사님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5) 예수님의 칭찬을 듣기에 사람들의 칭찬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면 목사님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6)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예수님 때문이라고 염려하고 근심하지 않게 되었다면 목사님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7) 가시같이 괴롭히는 사람들도 예수님 때문에 사랑하게 되었다면 목사님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8) 목회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면 목사님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9) 은퇴할 때, 아무 미련이 없이 교회를 떠날 수 있게 되었다면 목사님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코로나를 두려워합니다. 홍수를 두려워합니다. 앞으로 또 다른 두려운 일들이 다가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입니다. 위기 속에서 과연 나는 누구를 믿고 있는지, 누구에게 의지하고 있는지, 무엇을 가장 두려워해야 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며 새로운 한주를 시작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