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200809_설교정리_ACTS29⑩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시선으로 살라 (행 4:32-37)

서정원 (JELOME) 2020. 8. 9. 15:44

○ 말씀전문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 설교요약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본 영화 [제자 옥한흠]에서 본 내용 중에, '한국 교회를 살리는 방법'으로 하신 말씀이 지금도 내 마음에 울림이 있고 늘 나를 다잡는 주춧돌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더 낮아지고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늘 교회란 무엇인가 라는 것을 가슴에 두고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란, '세상에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곳' 혹은 '세상으로 보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인 곳'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늘 봉사와 선교와 전도도 함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초대교회 내에서의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들 지금은 한국 교회의 위기라고 하는데, 그럼 이 시기에 우리가 복된 믿음의 교회로 다시 거듭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참된 교회로 거듭남으로써 우리가 사도행전 29장의 주인공이 되려면...

 

1.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시선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앞에서 우리는 당시 권력의 No1,2,3 앞에서 보여준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앞에 서 있는 서슬시퍼런 그들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들 앞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본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부릅니다. 23절과 24절입니다.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그것을 듣고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그들의 터져 나오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당시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로마의 권세 앞에서, 어떻게 하면 작은 권세라도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 권세에 빌붙어서 살 수 있을까만 살피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대적 환경 속에서도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너머에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권세는 모두 바밸론에 있다고 믿었고 너나 나나 바벨론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각종 우상들이 따라 들어와 수많은 우상들이 난무한 곳이 되었습니다. 또한 절대적 권력의 거침없는 타락으로 오직 복종만이 강요되었습니다. 그러한 우상속에서, 권력 아래에서도, 다니엘이 굳건히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시선을 잃지 않았던 것 때문입니다. 다니엘서 6장10절입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말씀 속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문장이 '전에 하던 대로'와 '그의 하나님께'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의 삶이요 그의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이 시선을 잃지 않을 때 우리는 ACTS29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래리 오스본은 [바벨론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라는 책에서, '다니엘의 세상 이기는 세 가지 비결' 을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①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분명한 정체성입니다. 당시 바벨론은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사람들에게도 바벨론의 언어, 문학, 종교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름도 바벨론 신들의 이름을 딴 것으로 바꾸도록 해서 자연스럽게 바벨론 신을 부르게 했습니다. 다니엘도 밸드사살이라는 이름으로 개명 당했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의 이름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② 세속에 물들지 않는 영성입니다. 바벨론 왕은 크게 대접해야 할 일이 있으면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대접을 했습니다. 당시 이것들은 우상에게 드렸던 음식 그대로였습니다. 이러한 교묘한 유혹에 다니엘은 뜻을 굽히지 않고 멀리 했습니다. ③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시선입니다. 당시엔 왕 외에 다른 신에게 절을 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는다는 조서가 있었던 때입니다. 다니엘은 그 조서를 알고도 '그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전에 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 무릎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죽음을 불사한 시선의 고정이었습니다. 다들 그 시대를 통치하는 사람은 바벨론의 왕이라고 부르짖었지만, 다니엘은 세상을 지배하시는 분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도 이 시선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은 역사상 최고로 발전된 시대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또한 최고로 오염되고 타락된 시대이기도 합니다. 부가 권력이 되고, 돈이 우상이 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은 이 부와 돈에 가 있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집중해야 합니다. 다니엘처럼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께 무릎 꿇고, 내 삶의 인도자는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복된 한 주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2. 물질의 정확한 성경적 위치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시선을 두어야겠다고 결단하지만, 연약한 우리는 또 쉽게 그것을 잊어버립니다. 그 망각을 방지하기 위해 본문은 우리를 유혹하는 물질관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당시 성령 충만하게 된 그리스도인들의 물질관, 나눔의 모습들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종이나 노예로 살았기 때문에 물질적으로 풍요하지 않았을 텐데도, 그들은 나누고 베풀기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것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아래에 가져다 두고, 사도는 그것들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습니다. 33장부터 35장입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하나님의 은혜, 즉 성령 충만하게 되자 그들은 자기 욕심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물질이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선인 삶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볼 문장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라는 표현입니다. 그냥 자기 것을 팔아서 헌금을 했다 하지 않고, 유독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물질관, 물질의 가치적 위치를 나타냅니다. 돈의 가치를 머리 위에 두지 말고, 가장 낮은 위치에 두라는 의미입니다. 물질의 명확한 성경적 위치는 사람들의 발 아래입니다. 머리에 두면 곧 우상으로 변질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는 나름의 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처음에는 선한 뜻에서 출발하더라도 순서를 잃어버리면 그 독성을 드러냅니다. 돈을 앞세우면 돈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을 잃어버립니다. 남편 사랑을 도가 지나치게 앞세우면 의부증이 됩니다. 순서잃은 자녀 사랑은 자녀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의 명확한 위치가 어디 인지를 늘 기억하고 그것을 하나님 보다 앞세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을 행한 시선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데스티니 (계획)를 이루어가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시선을 둔다는 것은 멍하니 하나님을 바라보고만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을 하나님께 맡겨두고 그냥 편안하게 기다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헤아리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서로 나누고 섬긴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모두가 무기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만 한 사람의 이름만이 거론됩니다. 36절과 37절입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바로 요셉이며 사람들이 바나바라 부른 사람입니다.

왜 이 바나바만 유독 이름을 거론하고 있는지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셉이라는 이름은 애굽의 총리까지 오른 요셉의 이름을 딴 것이므로 듣기 좋은 이름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붙여준 바나바란 이름도 '위로의 아들' 이라는 뜻으로 바나바 입장에서는 듣기 좋은 말이었을 것입니다. 바나바란 이름을 얻은 것은 그가 토크레마, 즉 밭의 일부가 아닌 전부를 팔아서 헌금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파나클레시스, 즉 위로자 격려자란 이름으로 불리워진 것입니다. 보통인의 경우, 자기 전 재산을 팔아서 기부를 하던지 헌금을 하고 나면 어깨가 으쓱해지고,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만일 요셉도 그랬다면 그는 결코 바나바란 이름으로 불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자기 재산을 다 내어 놓고도 겸손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데스니티를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을 뒷받침 해 주는 근거를 사도행전에서의 바울과의 관계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와 바울은 떼레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발전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는 그 두사람을 부를 때 처음에는 '바나바와 바울'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다가 차츰 시간이 흘러가면서 '바울과 바나바'로 바뀝니다. 결국 나중에는 바울만 나오고 바나바의 이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어떻게 보면 바울이 이룬 위대함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겠으나, 만약 바나바가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자신의 위치가 낮아지는 것에 대해 견디지 못하고 하던 일을 그만 두었다면 바울의 위대한 역사가 있을 수 있었을까 싶습니다. 자신이 뒤로 밀리는 것도 아름답게 감수한 배경에는 오직 하나님의 데스티니를 바라보고 순종한 그의 위대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전에 이 데스티니에 대한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이후에 어떤 성도님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데스티니를 알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고 봅니다. ① 만남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먼저 만나야만 합니다. ② 순종입니다. 데스티니를 가로막는 장벽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부수어야만 합니다. 데스티니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은 어쩌면 자기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현실을 포기하지 못하는 주저함이 장벽일 수 있습니다. 이 주저함은 순종으로 극복될 수 있습니다. 세미한 음성에도 순종하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③ 거룩입니다. 데스티니의 파괴자는 죄입니다. 거룩하지 못하면 죄에 굴복하게 되고 그 죄의 유혹으로 인해 하나님이 내 눈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코로나 사태에다 폭우로 인해 우리의 온 신경이 그곳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들에 시선이 가 있는 사이에 우리는 나에 대한 데스티니를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 봐야 하겠습니다. 지금의 문제 해결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곳을 바라보는데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 우리입니다. 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은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실까? 혹시 하나님이 내게 해야 할 일을 주셨는데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있거나 주저하고 있지는 않는가? 다시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려서, Destiny가 멈추지 않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엘라 윌콕스의 "하나님의 약속"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약속]

 

내가 탄 배,

항해중에 돛대가 부러질 지라도

돛이 찢어져 난파하여 돌아 올지라도

나는 주님을 의심치 않으리라

 

그러나 내 이 모든 희망이 산산조각 나더라도

여전히 나는 주님을 의심치 않으리

어려움과 고통을 통해서

주님은 결국은 내가 원하는 곳으로 보내주신다네

 

상처입고 실족 할지라도

더 큰 것을 얻게 되리라

실패함이 없는 주님의 계획을 나는 믿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