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200614_설교정리_행(1:6~11)_ACTS29의 비전을 이루는 삶이 되라2

서정원 (JELOME) 2020. 6. 14. 21:28

○ 말씀전문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 1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 설교요약

세상에는 다양한 모습들의 교회들이 있습니다. 크기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레너드 스윗은 교회의 형태를 네 가지로 분류하였습니다. 첫째, Missonary Church (선교의 열정으로 가득한 교회), 둘째, Ministry Church (사역에만 집중하는 교회), 셋째, Maintenance Church (현상 유지에 급급한 교회), 넷째, Museum Church (박물관화 되어버린 교회) 입니다. 이 분류에 의하면 한국 교회들의 대부분은 Missonary 교회에서 시작하였다가, Ministry와 현상유지에 급급한 교회에서 안주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반면에 많은 유럽의 교회들은 박물관화 되어버린 교회들이 대부분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한국 교회는 아직 회생이 가능한 상태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신동탄지구촌교회는 첫쨰인 Missonary 교회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항상 초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한 비결은 우리 모두가 ACTS 29 (사도행전 29장)의 비전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ACTS 29의 비전을 이루는 삶을 이루기 위해, 행함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하고, 성령님의 일하심에 주목해야 하고,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 본문은 거기에 더해, ACTS 29의 비전을 이루는 삶을 살기 위한 또 다른 관점과 초점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1. 복음에 대한 초점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는 3절에서 "그가 고난을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계심을 나타내사"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가 기록한 성경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입니다. 그가 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강조하고 있는 공통점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그리스찬들은 복음이란 단어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복음이 무엇인가 라고 물으면 의외로 잘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목사를 꿈꾸며 공부하는 신학대학 학생들에게 꿈이 무엇인가 물으면 대부분이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복음이 무엇인지는 잘 깨닫지 못합니다. 복음이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내 주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비밀을 가장 잘 안 사람이 바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았습니다. 복음을 제대로 알면 우리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5절에서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행하기를 원한 간절한 소망이 복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로마 교회가 복음을 몰라서 그렇게 말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삶이 그 복음에 초점을 두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중에도 수십년 동안 교회를 다닌 사람도 많고, 모태신앙인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복음에 초점을 맞춘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입니다. 우리 교회는 복음을 비전으로 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이름만 걸어놓는 성도, 교회로 머물러서는 무의미한 인생일 수 밖에 없습니다. 삶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성도다운 성도, 교회다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복음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복음에 초점을 맞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ACTS 29의 비전을 이루는 길입니다.  

 

2. 성령의 임재함이 있어야 합니다.

8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는다고 합니다. 권능이란 권세와 능력입니다. 똑 같이 예수님을 믿는데도 교회 안에는, 존경받을 만한 신앙심을 가진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돈이 많고 권력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성령이 그 사람에게 임했는가에 따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두 종류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① 사복음서적인 제자들과 ② 사도행전적인 제자들입니다. 같은 제자들의 경우에도 그들의 모습이 ①의 상태였을 때가 있었고, ②의 상태로 산 때가 있었습니다. 사복음서적인 제자들은 베드로가 하루 밤 사이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것처럼 언제든 흔들릴 수 있는 제자들입니다. 반면에 사도행전적인 제자들은 아무리 힘들고, 목숨이 달려있는 상태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제자들입니다. 사도행전적인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오직 성령이 임재할 때입니다.

구약에서도 성령의 임재함으로 완전이 달라진 사람의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기도온입니다. 그는 원래 소심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사사기 6장 34절이니다.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성령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니 소심하던 그가 용사로 변모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령이 임하시면 어떤 일에든 권능을 받게 됩니다. 용사가 될 수 있습니다.

임한다는 것은 '마바쉬'인데 '옷을 입다' 라는 뜻입니다. 성령이 임하신다는 것은 성령의 의복을 입혀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제가 경험한 지인의 경우로 간증해 드리겠습니다. 목회의 꿈을 갖고 공부한 그 분은 말더듬이 심하여 목사로서의 사역에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해외 선교사로 나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고, 부임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작은 교회에서 그분에게 설교를 요청했습니다. 말더듬이이고 설교에 대한 경험이 없어서 정중히 거절을 했습니다. 하지만 거듭된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서, 설교 말씀을 준비하면서 엎드려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강대상에 오르기 전까지도 말을 더듬지 않도록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어땠을까요? 기적 같이 전혀 말을 더듬지 않고 설교를 마쳤습니다. 그분이 목회를 한지 20년이 되었지만 지금도 설교에서는 전혀 말을 더듬지 않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이런 기적도 일어납니다.

우리는 자주 힘들어 하고, 작은 일에도 낙심합니다. 왜 이리 잘 지치고 잘 낙심 할까요. 사도행전의 바울에 비하면 우리의 힘듦은 비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힘들다 하지 않습니다. 즐겁다고 합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원인은 우리가 성령 없이 일하기 때문입니다. 기도 없이 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ACTS 29의 비전을 이루려면, 권능을 받고, 지치지 않고 낙심하지 않는 권능을 받는 것입니다. 그 권능은 성령이 임할 때 받습니다.

 

3. 다시 오실 주님에 초점이 있어야 합니다.

10절과 11절입니다.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너희들이 예수님을 본 그대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겁니다. 사도행전의 가장 큰 수혜자는 바울입니다. 사도행전의 7장 이후는 바울의 행적입니다. 그 가운데 24장과 25장에서 그는 기독교의 핵심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강조합니다. ①의와 ②절제와 ③장차 오실 심판이라고 했습니다. 이 강조의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3차 전도 후에 가이사라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그때 유다 총독인 벨릭스가 그에게 질문을 한 것에 대한 대답이 이것이었습니다. 벨릭스는 브루실라를 아내로 맞았는데 브루실라는 그의 3번째 부인이었으며, 브루실라도 벨릭스가 3번째 남편이었습니다. 막장 같은 결혼을 한 것을 보면 안하무인인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그도 바울의 이 복음을 듣고는 진짜 하나님의 심판이 있겠구나 하면서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앞에 가기만 하면 굽실거리면서 아부하기에 급급했는데, 감옥에 갇혀있는 상태에서도 당당하게 얘기하는 바울을 보면서 사실일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바울이 벨릭스 앞에서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삶이 이 세 가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다시 오실 주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유혹 앞에 직면 할 수 있습니다. 게을러지고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핑계를 대고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현실과 타협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현실에 타협하고 안주하면 ACTS 29는 물건너 갑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이 가실 그때 그 모습대로 다신 온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자신을 추스러야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이를 악물고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은 끝이 정해져야 지금을 제대로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끝에는 심판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 심판이 있음을 기억하고 지금을 절제하며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도행전 29장을 성공적으로 써 내려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