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02_설교정리_복음의 '수고'라고 쓰고 '은혜'라고 읽다
○ 말씀전문
[빌립보서 1장 3절~7절)
0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간구하며
0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0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0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0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 말씀요약
한기채 목사님이 쓴 [삼중혁명의 영성]에 보면
프랑스의 두 공동체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떼제공동체와 클뤼니수도원에 대한 얘기입니다.
떼제공동체는 밖으로 보이기에는 허름하지만
해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곳에 찾아와서
신앙의 원천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갑니다.
반면에 화려한 클뤼니수도원은 겨우
관광수입에 의지하여 유지되고 있습니다.
클뤼니수도원이 이런 모습으로 떨어진 것은
남을 기억하고자 하면서도
스스로는 기억하지 못함 때문이라고 봅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초심을 잃어버리고 있는 스스로를 바라보지 못하면
우리도 결국 클뤼니수도원과 같은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교회다움의 본질을 회복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1. 복음을 위한 파트너십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는,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고백하는 Saviorship과
구원자를 주로 고백하는 Lordship 그리고
복음에 대한 동역자 의식인 Partnership이 있어야 합니다.
전자의 두 사상은 우리 자신의 몫이지만
세번째인 복음은 혼자가 아닌 공동체의 몫입니다.
우리가 함께 엎드리고 기도할 때
그 때 하나님이 일하시고 이루십니다.
이번 주에는 국내선교 행사가 있습니다.
이 행사에는 가는 선교사와 보내는 선교사가 있습니다.
직접 참석하여 땀 흘리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못해 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기도도 필요합니다. 함께 파트너십을 발휘할 때
우리의 수고가 은혜로 나타날 것입니다.
2. 복음의 수고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수고에 참여한 자라고 하지 않고 은혜에 참여한 자라 함은
복음을 위한 고생과 수고가, 그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숨어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뒷바라지 하면서 엄청 고생을 하지만
그 자녀가 성장하여 자랑스런 사람으로 우뚝서면
우리는 그 고생을, 이 기쁨을 주기 위한
은혜라고 생각하며 고생했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도폭발훈련생들이 훈련을 받고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왜 하나님이 이 훈련을 받게 했는지
그 은혜를 깨닫게 되었다고 이구동성으로 간증합니다.
복음의 수고가 결국 은혜가 될 것임을 아는 자는
'수고와 고생'이라 쓰고 '은혜'라고 읽는 자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위해 함께 일하고
그 속에 은혜가 있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3. 주님이 이루실 일들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빌립보서를 일명 기쁨의 서신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쓴 서신인데도 기쁨을 말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심은 작은 씨 한 알 한 알이
비록 자신은 그 열매를 볼 수 없을지 몰라도
예수님이 오실 때는 반드시
아름다운 열매를 맺음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획하신 것들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이 기대를 확고하게 가진 사람은
비록 지금 힘들고 아픈 수고를 할지라도
그 수고를 수고로 보지 않고 열매를 바라봅니다.
그래서 우리도
바쁜 시간 중에도 복음을 위해 시간을 내고
그것을 수고가 아니라 은혜라고 바라볼 수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