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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04_믹스커피

서정원 (JELOME) 2019. 3. 6. 10:47

월요일 아침은 더욱 여유롭다. 아파트 피트니스 센터가 휴관하는 날이라 샤워만 하고 곧바로 출근하기 때문에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회사에 도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무도 출근하지 않고 1층 사내식당에 여사장님만 나와서 이른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나보다 늦게 나오는 직원들에게 미안한 감이라도 줄까봐 집무실 문을 닫은 채 QT를 시작한다.  조용함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좋다. 그리고 식당으로 내려가 따뜻한 아침식사와 구수한 누룽지를 먹고 올라와 목장에서 함께 약속한 성경읽기까지 마무리 한다.

일과가 시작되기 전에 믹스커피 한잔을 타서는 창문 밖으로 내다 보이는 시골풍경의 한적함을 즐긴다. 블라인드 아래로 내다보이는 수향마을에는 아직도 한기에 서린 아침 이슬이 마른 풀과 앙상한 나뭇가지에 골고루 칠해져 있다.

저쪽 공단조성작업장에 추위를 쫓으려는 부지런한 인부들의 모닥불이  따스해 보이고 그것이 손에 든 커피 맛을 더욱 구수하게 느끼게 한다. 옛날 시골 아침도 참 추웠었다.  아침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 짚동에서  짚단 두어 개를 뽑아서 짚불을 놓고추위를 쫓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 곁에 서서 가끔 아버지를  도우기

도 했는데 짚불에 얼굴이 화끈거려 뒤돌아 불을 쬐면 뜨거움이 엉덩이를 덮은 바지 속으로 파고 들었었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손길 따라 불길을 떠나면 곧바로 한기가 온몸을 옴츠리게 했었다. 그 시절엔 왜 그리 장갑도 흔치 않았는지 모르겠다. 장갑이라도 있었으면 자라등처럼 딱딱한 아버지의 손등이 그리 시려보이지 않았을 탠데 싶다. 출근하는 직원들의 차량들이 하나둘 들어서더니 차량 엉덩이를 내게로 향한 채 줄을 맞춰 선다. 

아침부터 일어나  출근하는 남편들에게  따뜻한 국물이라도 마시게 한 아내들의 아침식사를 들고 나왔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힘든 직장 생활이 가족들의 든든한 후원으로 큰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득 창 밖을 내다보는  나의 모습이  밖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창살 속에 힌 새의 모습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데 없는 노년에 내게 주어진 개인 사무실이라는 감사함이 그것을 덮는다. 퇴임하고 집에 있으면 아내의 구박 속에 살게 된다는데,  여유가 있는 사람은 그래서 돈을 들여서라도 사무실을 얻는다고 한다. 그 공간이 노년기에 누리는 자기만의 공간이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여유가 없는 사람은  마땅히 갈 곳이 없어 방황한다고들 한다.  그럼에 비하면 내게 주어진 이 집무실은 참으로 고급스런 공간임에 틀림없다. 창을 열면 회색 빛 건물들이 아니라  철 따라 갈아입는 자연을 볼 수 있고,  부지런한 사람들의  부지런한 모습들을 보면서 내게 늘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함을 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일만 하다가 죽는 세상이라고들 한다.  간혹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쉰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주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  그 쉼도 우리에게 곧 지루함을 주게 됨을 닫게 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 쉼이요 인생이요 가치임을 깨닫게 된다.  일도 노는 것이라  생각하면 그 일이 감사한 것이 된다.

종이컵에 타 왔던 믹스커피의 온기가 사라져가고  미지근한 커피 맛이 입맛을 잃게 한다.  하지만 그것을 버리러 가기가 귀찮아 홀랑 마시고 창가를 떠나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내 앞에 펼쳐진 컴퓨터 화면이 나를 반긴다.  그리고 하루를  축복하고 격려하는 아내의 카톡 메시지 소리가 나를 채찍질 한다.





여 유

살아온 날보다 살아가야 할 날이 더 많기에
지금 잠시 초라해져 있는 나를 발견하더라도 난 슬프지 않다
지나가 버린 어제와 지나가버린 오늘
그리고 다가올 내일
어제 같은 오늘이 아니길 바라며
오늘 같은 내일이 아니길 바라며
넉넉한 마음으로 커피한잔과 더불어 나눌 수 있는 농담
그리고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로움이 있다면
초라해진 나를 발견하더라도 슬프지 않을 것이다
.
그저 누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바랄 뿐이다
우리는 하루를 너무 빨리 살고 너무 바쁘게 살고 있기에
그냥 마시는 커피에도 그윽한 향이 있음을 알 수 없고
머리 위에 있는 하늘이지만
빠져들어 흘릴 수 있는 눈물이 없다
세상은
아름다우며 우리는 언제나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고 있다
지금 난 초라하지만 넉넉한 마음이 있기에
커피에서 나는 향기를 맡을 수 있고
하늘을 보며 눈이 시려 흘릴 눈물이 있기에
난 슬프지 않고
내일이 있기에 나는 오늘 여유롭고 또한 넉넉하다